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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2024.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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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1절 ~ 12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설교문 보기

히브리서 기자는 5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칭함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히 5:10). 그런데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듣는 데 둔해졌기 때문입니다(히 5:11). ‘둔하다’라는 말은 듣는 것에 무관심하거나 이해력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설명을 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진리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앙의 초보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간으로 보면 그들은 이미 선생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마땅할 정도로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여전히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야 어떻든 그들은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할 만큼 영적으로 침체해 있었습니다(히 5:12).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에 비유했습니다(히 5:13). 바울도 이런 자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라고 칭했습니다(고전 3:1).

성경에는 어린아이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 의미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면서(마 18:3),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이고(마 18:4),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14). 이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어린아이는 신앙의 성장이 없는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 막 신앙에 입문한 사람처럼 아직도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의의 말씀 곧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나 교훈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음식으로 말하면 단단한 것을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기초적인 지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도 분별하지 못하며, 삶 속에 열매도 없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사람들의 속임수와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져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엡 4:14). 또 배가 파도에 밀려 떠다니는 것처럼 온갖 교훈에 휩쓸려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거짓된 교훈에 휩쓸려 신앙이 흔들리거나 사람의 속임수와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즉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앙의 대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본이며 매우 중요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한 원인을 무지(無知)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호 4:6),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호소했습니다(호 6: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인애 곧 자비를(마 12:7),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셨습니다(호 6:6). 공의를 실천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즉 자신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미 6:8).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정반대였습니다. 이웃에게 공의를 행하거나 자비를 베푸는 일, 하나님을 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 되지 않을뿐더러(암 5:22, 23) 도리어 책망을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곧 영적 예배이고(롬 12:1), 그렇게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아울러 성숙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 완전한 데 곧 성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빌 4:13). 그리고 7절에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땅'은 성도를 가리키고, '비'는 하나님의 은혜(마 5:45 ; 사 44:3)와 말씀(신 32:2), 성령의 은사(사 44:3) 등을 가리킵니다. 좋은 땅은 비를 잘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는 것같이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고후 6:1) 그 은혜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므로 신앙이 성장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고(갈 5:22, 23), 에베소서 5장에 언급된 빛의 열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엡 5:9). 성도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고(갈 5:16)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갈 5:18) 하나님의 자녀요(롬 8:14), 빛의 자녀입니다(엡 5:8).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고, 빛의 자녀처럼 행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고 했습니다(히 6:8).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의 산물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으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낸 것입니다(창 3:17, 18).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 것은 비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밭 가는 자들의 수고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땅에 있습니다. 땅이 좋지 않기 때문에 채소대신 가시와 엉겅퀴를 낸 것입니다. 그런 땅은 더 이상 쓸모가 없으므로 버림을 받습니다(사 5:6).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결국 믿음에서 떠난 배교자들(살후 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의 종말이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혹자(Calvin)는 이들을 이름뿐인 신자 혹은 명목상의 신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오히려 육에 속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과 방탕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음과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분쟁과 분열과 파당과 시기와 질투와 술 취함 등입니다(갈 5:19-21).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겠습니까(갈 5:21).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인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육에 속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비록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으나 그들에게도 성도의 모습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를 섬겼고 지금도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히 6:10). 이는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히 6:9). 물론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고,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임을 삶을 통해 나타내는 것입니다. 선행은 구원의 근거나 수단이 아닌 믿음의 결과일 뿐입니다(약 2:18).

나무는 열매로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엉겅퀴에서 무화과가 열리지는 않습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 법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결국 찍혀 불에 던져지기 마련입니다(마 7:17-19). 과실수는 보통 묘목을 심습니다. 그런데 묘목을 심는다고 바로 열매가 맺지는 않습니다. 나무마다 다르겠지만 짧게는 2년에서 3년 길게는 5년에서 7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성장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금방 신앙의 열매를 맺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세월이 지날수록 키와 지식이 자라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신앙도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말씀이 없이 신앙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픔도, 어려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히 6:12).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