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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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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35절 ~ 41절 [개역개정]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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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병자 중에는 시각장애인들도 많았습니다(마 9:27-31 ; 12:22 ; 15:30 ; 20:34 ; 21:14 ; 막 8:22-26). 그런데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을 고치신 일은 요 9장에 나오는 사건이 유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를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앞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유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거나 한센병에 걸리는 것은 자기의 죄나 그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질병이나 고난이 반드시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고통이나 고난이 찾아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 하면 떠오는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욥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라고 할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욥 1:8). 그런 그가 고난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연단이었습니다. 즉 욥의 고난은 그의 믿음을 더 순수하고 견고히 하기 위한 연단으로서의 고난입니다(욥 23:10 ; 벧전 4:12 ; 약 1:3, 4). 이를 통해 욥은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알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욥 42:5). 바울도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질병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시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병이었습니다(갈 4:14). 이를 위해서 바울은 주님께 세 번 간절히 기도했으나 차도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에 가시 곧 질병을 주신 이유는 바울이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고후 12:7). 바울은 셋째 하늘 곧 낙원에 올라가는 신비적인 체험을 했고(고후 12:4), 거기서 크고 놀라운 계시들을 받았습니다(고후 12:7). 이러한 경험들은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 된 사람도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요 9:3).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 하기 원하시는 일들을 말하는데, 병자를 치료하시는 일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사 53:4-6).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보통 병자들에게 말씀하시거나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시므로 치유하셨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각장애인에게는 조금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란 뜻으로(요 9:7), 요한이 실로암이란 이름의 뜻을 굳이(?) 밝힌 이유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곳으로 가서 눈을 씻었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필(?) 이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요 9:14). 유대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침으로 진흙을 이기고 그것을 바른 것은 안식일에 금지된 행위였고, 시각장애는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는 위중한 병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는 것 역시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신 것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주는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마 12:8).

이에 사람들은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습니다. 안식을 범한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 그를 증인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시각장애인이 보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보다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해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고 했고, 반면에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온 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러한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요 9:16). 이에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가 네 눈을 뜨게 해 주었으니, 너는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했습니다(요 9:17).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가 정말 시각장애인이었었는지 의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를 불러 확인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자기 아들이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 눈을 뜨게 했는지는 알지 못하니 직접 물어보라고 했습니다(요 9:20, 21). 그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출교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요 9:22). ‘출교’란 '회당에서 쫓아내다'란 뜻으로, 이스라엘 사회에서 추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되면 회당의 출입은 물론이고 유대인과의 교제나 매매가 금지되는 등 이방인과 세리와 같은 취급을 당했습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믿더라도 그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요 12:42). 특히 관리 중에서 그랬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요 12:43). 어느 시대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때로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눅 14:26).

출교가 두려워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부모의 말에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요 9:24)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죄인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려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회유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입장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명백한 사실과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1-33)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그의 부모와는 달리 출교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오신 분으로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출교를 당했습니다(요 19:35).

그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비록 출교 당하므로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나 그로 인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게 되었으며,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요 9:38). 만일 그가 그의 부모처럼 출교가 두려워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에 동의했다면 비록 육체의 질병에서는 구원받았으나 영혼의 구원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시각장애인 그것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출교가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요 12:42). 반면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처럼 출교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세상에서 어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10:32). 진정한 믿음은 어떤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것입니다(롬 10:9).

한편, 예수님께서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니라”(요 12:47).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습니다(요 3:16). 반면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요 3:18).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하신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한다’는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맹인입니까” 하고 묻는 그들에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요 9:41).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은 비록 육체적으로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그들이 무지해서 예수님을 몰랐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고 그래서 성경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요 5:40). 한 마디로 그들은 영적 시각장애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니 시각장애인이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꼴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거짓 선생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 같이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마 15:14). 이 구덩이는 크고 깊어서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어둠에 다니는 자들의 최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래서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무지한 자는 배울 수 있지만 무지하면서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은 배울 기회조차도 놓쳐버립니다. 참으로 한심한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자신의 무지함을 예수님께 고하고 참된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