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수요예배설교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2024. 2. 7.

성경본문 보기

요한복음 6장 66절 ~ 71절 [개역개정]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중 많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유일한 사건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신 일명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마 14장, 막 6장, 눅 9장). 이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요 6:26).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로 생각했습니다(요 6:14).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신 18:15) 곧 메시야(행 3:22)가 바로 예수님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줄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요 6:15). 그들은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자신의 육체적인 필요를 채워주실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영생을 주는 양식 또는 생명을 영원토록 지속시키는 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 자신(요 6:35, 41, 48, 51) 또는 그의 말씀을 의미합니다(요 6:63). 그러자 사람들이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해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요 6:29)고 답하셨습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 6:27).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요 6:30)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전날 행해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 또 다른 표적을 구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는 부족하니 그보다 더 큰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같은 이적입니다(요 6:31). 유대인들은 만나를 모세가 하늘로부터 내려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만나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만나를 먹고서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따라서 만나는 영원한 양식도 참된 양식도 아니었습니다. 영원하고 참된 양식은 바로 그들 앞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으로 그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 6:51, 58). 즉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요 6:54).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논쟁을 벌이다 결국은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즉 대부분은 예수님을 떠났고 소수의 사람만이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 표면적인 이유는 말씀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만 영원히 살 수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을 먹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피를 마시는 행위는 율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레 17:10).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며 수군거렸습니다(요 6:60).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한 거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마 13:36). 모르면 배우면 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으면 됩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거나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평생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어렵다‘며 수군거리는 자들에게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요 6:64).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역시 제자로 불렸던 사람들입니다(요 6:66). 왜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그분을 따랐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다(요 6:26). 사람들의 관심은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적의 결과인 떡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해 여러 이적들을 행하신 것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이기도 하지만(막 8:3) 그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 5:36). 하지만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떡과 고기를 먹고 배부른 것으로 만족할 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게 썩어질 음식 대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복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만 열중하지 말고 영적인 일에도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6:66). 그들은 이름만 제자였고 그리스도인이었을 뿐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 중에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처럼 신앙적인 이유보다는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세상적인 이익을 주기보다 오히려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마 16:24, 2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실족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마 11:6 ; 요 6:61).

많은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분 곁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열두 제자입니다. 물론 그들 외에 다른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사도를 포함해 12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행 1:4)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행 1:14, 15). 그때 베드로가 시편의 말씀(시 109:8)을 인용하면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자고 제안했습니다. 사도의 자격은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행 1:21, 22)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늘 사도들과 함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두 사람을 추천했는데,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었고 또 하나는 맛디아였습니다(행 1:23). 이로 보건대 최소 이들은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날 때 사도들과 함께 끝까지 남아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는 것은 '주께서 영생을 주실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요 6:40, 47).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떠나갔을 때 열두 제자는 오히려 그 말씀을 붙잡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고(마 16:16), 그분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요 6:69).

 

그런데 베드로의 답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 마귀라는 것입니다(요 6:70). 이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하신 말씀입니다(요 6:71). 마귀는 타락한 천사 곧 귀신들의 왕으로(마 12:24) 그가 하는 주된 일은 사람들이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속여서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별명이 살인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요 8:44).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마 13:18)’에 보면 마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농부가 씨를 뿌렸습니다.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눅 8:11). 그중에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렸습니다. 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마 13:19). 그들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립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마귀가 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눅 8:12).

또 마귀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미혹하거나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밭에 뿌려진 씨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처럼 처음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다가도 신앙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기고 박해를 당하면 쉽게 넘어집니다(마 13:21). 또 재물에 대한 염려나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눅 8:14).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처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막 4:19) 마귀의 유혹을 받아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불충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 6:71 ; 13:2). 이렇게 재물에 대한 욕심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거나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만듭니다(딤전 6:10). 재물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욕심을 품을수록 신앙에서는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세계보다 이 세상에 더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 3:1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고(요 6:29),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요 6:40).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사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어렵다고,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고백하며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한 사람(마 26:24)이 아니라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했던 열한 제자처럼 예수님께 기억되는 제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