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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2023. 11. 26.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9장 1절 ~ 10절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습니다(눅 9:51).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안 좋은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혈인이라는 이유로 이방인 취급하며 멸시했고 그런 유대인들을 사마리아 사람들은 증오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대인들은 갈릴리에서 유대로 혹은 유대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요단 동편 베레아 지방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느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굳이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통과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눅 9:54). 그만큼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으시며(눅 9:55)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느니라” 이 부분은 한글개역성경이 참고한 고대사본에는 없고 그보다 후대 사본들에 첨가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눅 9:56). 이 마을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여러 정황상 갈릴리나 사마리아 지방이 아닌 데가볼리나 베레아 접경 지역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곳이 누가복음 17장(12)에 나오는 마을 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이 아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눅 17:11) 즉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이용하는 요단 동편 베레아(Perea) 지방으로 우회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러서 가르치셨습니다(눅 13:22). 그리고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한 시각장애인 길 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눅 18:35). 마가에 의하면 그는 디매오의 아들인 바디매오였습니다(막 10:46). 그리고 마태에 의하면 시각장애인은 두 명이었습니다(마 20:30).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눅 18:38).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던 일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듣던 사람들이 바디매오의 외치는 소리 때문에 말씀을 잘 들을 수 없게 되자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마 20:31). 그는 이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습니다(마 20:34 ; 눅 18:43). 만일 그가 잠잠하라는 사람들의 말에 위축되어 포기했다면 그는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낙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눅 18:1)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마 7:11 ; 눅 18:7).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고치신 후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고 또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죄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세금 징수하는 일을 공개입찰을 통해서 지역별로 민간에게 위탁을 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얼마만큼의 세금을 거두어 바치겠다고 견적을 넣으면 그중에서 가장 많은 금액을 써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낙찰을 받은 사람은 지역의 주민들을 고용해서 세금 징수하는 일을 맡겼는데, 그들이 바로 세리입니다. 그들은 고용주가 정해준 금액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 자신들의 몫을 챙겼습니다. 그 과정에서 속이거나 강제로 빼앗는 일도 있었습니다(눅 19:8). 사람들은 그런 세리를 ‘허가 낸 도둑’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일반 세리들이 그랬으니 그들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은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삭개오가 부자가 됐는지도 모릅니다(눅 19:2). 유대인들에게 무엇이 제일 나쁘냐고 물어보면 ‘산에서는 곰과 사자요, 거리에서는 세리라’고 할 만큼 세리는 백성에게서 철저히 외면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이나 창녀처럼 취급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조차 멸시를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척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마 11:19 ; 눅 7:34).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하며 멸시했지만(마 9:11 ; 막 2:16 ; 눅 5:30) 사실 그들도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지만(눅 18:9)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3:10, 23). 그러기에 바리새인이든 세리든 상관없이 사람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장애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길 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삭개오는 그분을 직접 뵙고 싶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오병이어 혹은 칠병이어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게 하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실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그분을 뵙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금 삭개오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흥미로운 사건들도 아닙니다. 그는 지금 신체적으로 아주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전혀 부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리의 친구라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마 11:19).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멸시를 당하는 세리들과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의 친구라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 삭개오는 그런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첫째, 신분의 장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혼자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부딪혀야 합니다. 그들이 삭개오를 달가워할 리 없습니다. 혹 그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둘째, 신체의 장애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무리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 가려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작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콤플렉스였고 그로 인해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열등감이 삭개오로 하여금 재물에 집착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았는데, 마침 주위에 돌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드디어 사람들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만일 키 때문에 포기했다면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혹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놓쳤을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여리고성을 지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에게는 그날이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한 것처럼(사 55:6)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야 합니다(고후 6:2).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 구원의 기회를 평생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들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결단의 장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근처에 오시더니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쳐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지나가실 줄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며 집에 묵어가시겠다고 하시니 삭개오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집으로 모시고 들어갔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한 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네 배를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느 세리들처럼 사람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속여 빼앗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머지 반도 부당하게 착취한 것을 갚는 데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결단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이런 결단을 하지 못해 다시 예수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고위직 관리였던 부자 청년입니다(눅 18:18, 23). 그는 젊은 나이에 재물과 명예를 얻었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청년은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선행을 쌓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실천했지만(눅 18:20) 그럼에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부자 청년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마 19:21).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가 재산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9:22 ; 눅 18:23). 그는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신했지만(눅 18:21) 사실은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율법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고 했지만 이 청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어느 것 하나도 내놓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리인의 복음서).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재산은 그의 신앙을 가로막는 장애였습니다. 그는 이 장애를 이겨내지 못했지만 삭개오는 이를 극복했습니다. 이러한 장애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종류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삭개오처럼 신분이나 신체의 장애가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이 신앙의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시간이나 사람이 장애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혹은 사람 때문에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온전히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장애를 이겨내고 극복해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이 있은 후 예수님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삭개오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영접했고, 자기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부당하게 착취한 것을 갚는 데 사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는 결국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보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눅 19: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삭개오가 세리라는 이유로 여전히 그를 죄인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이제 그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고(롬 3:2)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요 1:12)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마 19:29 ; 요 3:1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마 1:21 ; 9:13 ; 눅 19:10).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며(딤전 2:4),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벧후 3:10).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 늦지 않게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믿는 우리도 실족하지 않고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로 힘써야 할 것입니다(히 12:1). 우리 모두 신앙의 장애물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