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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2023. 11. 15.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19장 9절 ~ 14절 [개역개정]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사람들 중에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스승인 가말리엘(행 22:3)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자들도 있었습니다(행 5:34). 바리새인(Φαρισαῖος)은 ‘분리된 자’ 혹은 ‘분리주의자’란 뜻으로 그 기원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세기 경 셀레우코스(셀류쿠스) 제국의 통치자였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단 8:24 ; 11:21)는 당시 속국이었던 유대에 헬라의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그에 맞서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전통적 규범[장로들의 전통, 막 7:3]의 준수를 강조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분리된 자들’이란 뜻의 ‘페루쉼’이라 불렀는데, 이를 헬라어로는 ‘파리사이오이(φαρισαῖοι)’ 즉 바리새파(행 15:5) 혹은 바리새인들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또 지키는 의로운 자들이라고 자부했습니다. 반면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비난하고 멸시했습니다(요 7:49).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마 3:7 ; 12:34 ; 23:13).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행동하고 말하는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마 23:25 ; 눅 11:39).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려고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또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행 3:1).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더 효과가 크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시간이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 뜰로 모였다고 합니다(Barclay). 바리새파 사람은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에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 바리새인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마치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듯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말이 기도이지 사실 자기 자랑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금식과 십일조였습니다. 금식이란 '음식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것'으로 '슬픔' 또는 '회개'의 표시로서 행해졌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죽었다던가(삼상 31:13 ; 삼하 1:12) 병에 걸렸을 때(시 35:13) 혹은 국가적 재난을 당하거나(느 1:4), 하나님께 죄를 범했을 때(삼상 7:6 ; 왕상 21:27 ; 시 69:10 ; 단 9:3 ; 욘 3:5,7) 슬픔과 회개의 의미로 금식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도 금식이 행해졌는데(삼하 12:16 ; 대하 20:3), 모세의 율법에는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모든 백성이 다 금식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레 16:29-31 ; 23:26-32 ; 민 29:7). 그러다가 포로기 후에는 일 년에 네 차례 금식일이 정해졌는데(슥 8:19), 바리새인들은 공적인 금식일 외에도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어떤 학자(Marvin R. Vincent)는 그들이 매주마다 한 것이 아니라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 또 초막절과 성전 봉헌절 사이의 주간에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금식은 해가 떠 있는 낮 시간 즉 오전 여섯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만 행해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John Gill). 여하튼 바리새인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금식에 대해 탐탁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금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이 금식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마 6:16) 과도하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희게 하고 헝클어진 머리에, 구김살이 간 옷을 입고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거리로 나갔습니다. 물론 금식을 할 때는 자연적으로 용모가 흐트러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적인 자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초췌한 모습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금식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마 6:16-17).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니님의 긍휼 하심을 입기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6:18)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곡물이나 열매 등 땅에서 난 것의 십분 일과소나 양 등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레 27:30, 32). 그리고 이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과 달리 기업을 얻지 못했습니다. 즉 생계를 위한 땅을 분배받지 못한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의 기업이 되게 하셨습니다(레 18:24).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 그리고 근채와 운향 등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마 23:23 ; 눅 11:42). 이는 모세의 율법보다는 장로들의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이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린 것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마 23:23 ; 눅 11:42). 바리새인들은 십일조 등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서 규정 이상으로 열심이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율법의 정신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는 금식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이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입니다(눅 3:13). 이렇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일정 금액을 로마에 갖다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졌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사람들로부터 민족의 반역자나 약탈자라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이방인과 창기와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기 때문에(마 21:31) 성전 안들에는 출입을 할 수 없었고,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성전 바깥들의 출입만 허용되었습니다. 그곳은 성전의 일부로 이방인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장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을 위한 배려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은 이방인의 뜰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마 21:13). 그곳에서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과 기름 등을 매매할 수 있도록 했고, 성전세를 납부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외국 화폐를 환전할 수 있는 장소로 제공해 주기도 했습니다. 성전세는 성소의 세겔로만 내야 했기 때문에(출 30:13) 외국 화폐를 가지고 온 사람들은 성소의 세겔로 환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먼 지방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졌습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희생 제물을 살 수 있고 또 환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편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성전 안에서 행해진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비록 그곳이 이방인의 뜰이긴 하지만 분명 성전의 일부분입니다. 그런 곳에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와 가야바(눅 3:2)가 매매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에 동조했다는 것은 그들이 이방인의 뜰을 성전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명목하에 이방인의 뜰을 매매 장소로 허락한 이면에는 금전적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상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챙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말이 편의지 강제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희생제물로 바칠 짐승을 가져오면 대부분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는데, 이를 감별하는 것이 제사장들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는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았으니 그들이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외부에서 반입하는 짐승에 대해서는 가급적 불합격 처리를 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상인들이 파는 짐승들은 대부분 검열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시가보다 비싼 가격에 상인들로부터 짐승을 사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의 뜰은 짐승들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환전하는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아닌 시장통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예배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성전에서 예배할 수 있었고(왕상 8:41-43) 그곳이 바로 이방인의 뜰입니다. 그런 곳에 시장을 개설하고 더욱이 폭리를 취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로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고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는 그런 이방인의 뜰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성소와 가까운 이스라엘의 뜰에서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세리의 기도에 더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고 믿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그가 멸시하는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눅 18:14).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소외받는 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구했기 때문입니다(눅 18:13). 그는 바리새인과 달리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가슴을 친다는 것은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눅 23:48).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했습니다. 한 마디로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지만 바리새인은 교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약 4:6 ; 벧전 5: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매우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도덕적인 면에서도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이었고 가식적이었으며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멸시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그런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취해야 할 성도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눅 18:14). 바리새인처럼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은 낮아지고 세리처럼 자신이 죄인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바라는 겸손한 자들은 높아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비유에 나오는 세리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주요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듯이 그의 종이요 제자들인 우리 역시 겸손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