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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여호와께 간구하매

2023. 6. 19.
성경본문 보기

열왕기하 13장 1절 ~ 9절[개역개정]

1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제이십삼 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칠 년간 다스리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노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 넘기셨더니
4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그들이 학대받음을 보셨음이라
5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6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더라
7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병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 두지 아니하였더라
8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9 여호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설교문 보기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40년간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재위 23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17년 간 통치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요아스 때 엘리사 선지자가 죽게 되는데 그의 죽음과 여호아하스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신앙의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1. 이스라엘의 망은(忘恩)

예후가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는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이스라엘을 아람의 손에 넘기셨고 아람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아하스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어느 왕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남유다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긴 하지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이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해 왔습니다. 여호아하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난을 당하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아합 왕 때 아람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절대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람 군대를 격퇴시켰습니다(왕상 20:21, 29). 여호아하스는 이스라엘의 왕조실록에서 이러한 기록을 읽었는지 모릅니다(왕하 22:29).

여하튼 여호아하스가 하나님께 간구하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사 이스라엘을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여로보암 집안의 죄에서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으며,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까지도 그대로 세워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람에 의해 거의 전멸 직전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사사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일정한 패턴을 반복했는데, 그것은 범죄(삿 3:7), 징계(삿 3:8), 간구(삿 3:9 ; 4), 구원(삿 3:9, 10), 평안(삿 3:11) 그리고 다시 범죄(삿 3:12)로 이어지는 악순환이었습니다. 이러한 범죄의 악순환은 성경시대 이스라엘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개인적으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일 회개가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요 13:10 ; 요일 1:9). 이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역사를 신앙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유 1:7).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므로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를 언급하며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은 본보기로서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 10:6, 11).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사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우신 사랑과 크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엘리사의 사망

엘리사가 죽게 된 원인은 병 때문입니다. 그는 농부였을 때(왕상 19:19) 부름을 받아 임종할 때까지 하나님의 일에 매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렸습니다. 그것도 죽을병입니다. 이때 엘리사의 나이가 적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다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병이나 고난 등을 죄의 결과로 이해했습니다. 질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물론, 죄로 인해 질병에 걸리는 경우도 있지만(요 5:14) 그렇다고 모든 질병의 원이 죄 때문은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를 본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자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요 9:2)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따라서 질병의 원인이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또 성경에 나오는 질병 가운데 다수의 경우가 귀신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마 9:32 ; 12:22 ; 막 9:25 ; 눅 13:11). 세균 역시 질병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위장병과 다른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했습니다(딤전 5:23). 아마도 디모데는 물로 인해 위장병을 앓고 있었을 것입니다. 근동 지방의 물은 대개 병균들로 오염되어 있었으므로 끓이지 않고 계속 마실 경우 이질이나 위장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에 포도주를 섞어 마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디모데는 포도주를 섞어 마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포도주나 포도로 만든 것을 일절 먹지 않았던 나실인처럼(민 6:3, 4) 디모데도 자신의 정결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물만 마셨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처럼 질병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입니다. 고난이나 질병이나 모두 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는 질병도 고난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라고 하실 정도로 모든 것이 아름답고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병과 죽음이 찾아왔습니다(롬 5:12).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병에 안 걸리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라고 반드시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 중에는 일평생 어떤 질병이나 고통도 없이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시 73:4). 하지만 그런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시 37:1).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그들에게도 죽음은 찾아올 것이고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히 9:27). 그리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어느 민족이냐에 따라 차별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나 명예, 재산의 많고 적음 혹은 높고 낮음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계층의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가 심판의 기준이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한 일을 행하면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지만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화를 내리실 것입니다(롬 2:6-8).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대로(마 16:27)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고후 5:10).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뗄 수도 없고 나눌 수도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마치 바늘과 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만 없어도 나머지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을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약 2:18).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로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마 5:16 ; 롬 14:18).

3. 하나님의 긍휼

아람 왕 하사엘은 여호아하스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끊임없이 이스라엘 억압했습니다. 이에 여호아하스가 하나님께 간구하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사 이스라엘을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 이유를 이스라엘이 억압받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하 1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맺은 언약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 언약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 주시겠다는 것으로(창 15:18 ; 17:8) 후에 이삭(창 26:3, 4)과 야곱(창 28:13-15 ; 35:12)에게 반복되었습니다. 이 언약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망시키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으며 지금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왕하 13:2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시 103:8).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들을 맞아 주실 것입니다(눅 15:20).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은 미련하고 어리석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도 몰랐고(신 32:6),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삿 2:10).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락의 악순환을 반복할 때에도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셨습니다(대하 36:15 ; 느 9:26, 30).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왕하 17:6).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 딤전 2:4).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요 3: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벧후 3:15). 회개의 기회를 주심에도 계속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비의 손길을 끝내 외면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처럼 결국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살후 1:9).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