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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 권위있는 새 교훈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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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장 21절 ~ 28절 [개역개정]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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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마 2:23 ; 눅 4:16). 그리고 서른 살쯤 되어(눅 3:23) 갈릴리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는데(마 4:13) 그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습니다(마 4:17).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을 비롯해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마태 역시 이곳에서 세리로 일하다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마 9:9 ; 막 2: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놀라워했습니다. 여느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이나 모세의 율법을 기계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지키도록 강요만 할 뿐 새로운 것도 없었고 전혀 은혜롭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어깨에 지워진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마 23:4). 그런데 예수님의 교훈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만을 가르치셨고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도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지치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막 6:34). 그래서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막 12:37). 반면에 율법학자들은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마 23:33).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높임 받는 것을 좋아할 뿐 백성들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이 아닌 행동으로도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라워하고 있을 때 마침 회당에 있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눅 4:33)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2:34). 자신을 숨기고 있던 귀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자'란 뜻으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멸하러 오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요일 3:8).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던 세례 요한 조차도 처음에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요 1:31-34). 그 마저도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의심한 적도 있었습니다(마 11:2-6). 그런데 귀신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마 8:29 ; 막 1:34 ; 5:7),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의심하도록 만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는 귀신을 꾸짖으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자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큰 소리를 지르고 떠나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더러운 귀신이 즉각 순종을 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마 12:27). 초대 교회 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eaus)에 따르면 어떤 유대인들은 마술을 사용하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귀신을 쫓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의 이름도, 어떤 주술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만으로 귀신을 축출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권세는 그들에게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온 갈릴리 지방에 퍼져 나갔습니다(막 1:28).

그날 해질 무렵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들을 비롯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루는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 질 때까지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루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병자의 생명이 위급하지 않은 한 어떠한 치료나 환자를 옮기는 일 등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눅 13:14 ; 요 5:10). 그래서 사람들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해질 무렵 즉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에게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 주셨습니다(눅 4:40).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뿐만 아니라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어느 동네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눅 5:4). 고대사회에서 나병은 마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는 것만큼 고치기 어려운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병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부정한 자로 성전 출입을 할 수 없었으며(대하 26:21) 사회활동이나 다른 사람과의 접촉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리기 위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레 13:45). 또 진영밖에서 살아야 했는데(레 13:46), 나병환자들끼리 모여 공동생활을 했습니다(왕하 7:3 ; 눅 17:12).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병환자가 보이면 숨거나 도망했으며, 심지어 나병환자가 멀리 떨어지도록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병환자는 사람들에게 산송장 취급을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나병환자가 율법을 어기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마 그는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알아볼 수 없도록 변장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해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몸에 나병이 걸렸기 때문에 변장을 한다고 해도 환부가 썩는 냄새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아온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아마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고, 그 즉시 그는 나병에서 깨끗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행위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였기 때문에 그와 접촉한다는 것은 부정을 자초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료하실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병환자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에게 손을 대게 하신 것입니다(막 1:41).

예수님께서는 나병에서 깨끗하게 된 사람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셨습니다. 다만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드려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의 치료 여부는 제사장이 판단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은 먼저 그의 몸을 제사장에 보여야 했습니다(레 14:2-20). 제사장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나병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사회적인 활동과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가 유대인들이 그렇게 중시하던 율법을 통해 인증받게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셨을까요? 성경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짐작건대 사람들이 본질보다 현상 즉 복음보다 이적에 더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들었다고 했지만(눅 5:15) 그들은 말씀을 듣기보다는 병 고침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고 배부른 까닭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것처럼 말입니다(요 6:26).

예수님이 어떤 이유에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엄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이 일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잠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막 1:45).

자신이 겪은 신앙적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말씀에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삼상 15:22).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제일 된 목적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마 1:21). 물론 치유도 그분의 중요 사역 가운데 하나이기 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예수님께서 경계하셨던 본질보다 현상에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신자를 전도하는데 복음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처럼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보는 것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롬 10:17). 따라서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죽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눅 16:31).

바울은 누구보다도 신앙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천국도 체험을 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자랑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또 그것을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이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교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그것도 14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한 사람'이라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도 하지 않았습니다(고후 12:2-4). 만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이 체험한 천국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을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화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우리 삶의 제일 된 목적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