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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2023. 4. 9.

성경본문 보기

누가복음 24장 13절 ~ 27절 [개역개정]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오늘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매년 그 시기가 달라지는데, 이는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춘분 후 만월(보름달) 다음에 오는 첫 번째 주일’에 부활절을 지키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에서 정해지는데 올해는 4월 9일이고 내년 부활절은 3월 31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유대의 종교력으로 1월인 니산월 14일 즉 유월절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세상에서 부활절을 지키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활절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특별한 날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부활은 대속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며 핵심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전 15:12). 그런 자들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고전 15:13).

사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지 삼일 째 되는 날 곧 안식 후 첫 날인 일요일 새벽에 일단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것(눅 23:53)으로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마 27:66 ; 막 15:46, 16:4). 그래서 여인들은 이 돌을 누가 굴려 줄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마 28:2).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가니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그들 곁에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곧 천사들이 서서 말합니다(마 28:5).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 24:5-7).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눅 9:22). 여인들도 이를 들었습니다(눅 24:8). 하지만 당시에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막 9:32).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인들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열한 사도와 다른 제자들은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게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말대로 빈 무덤임을 확인했지만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길 뿐(눅 24:1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습니다(요 20:9).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를 떠나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입니다. 그들은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실망한 나머지 그들의 집으로 추정되는 엠마오로 가던 자들이었습니다(눅 24:13). 그들은 여인들로부터 천사들이 전해 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고 예수님을 뵈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도 믿지 않았습니다(막 16:11).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눅 24:16). 절망과 슬픔으로 인해 마음이 어두워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므로(막 16:12).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본 이유가 평상시 모습과는 달랐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요 20:14).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지 않았다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눅 24:31). 그러면 왜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던 것일까요?

첫째, 오해 때문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 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화를 재현해 줄 메시아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선지자’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요 6:14). 더욱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요 11:45 ; 12:11).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신 후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요 11:6). 베다니에 도착하니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요 11:39). 유대인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흘 동안 시신을 떠나지 않고 소생의 기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나흘이 되었으므로 그 기회마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시신은 냄새가 날 정도로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게 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요 11:42). 실제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 11:45 ; 요 12:11).

유월절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시자 명절을 지키기 위해 와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곧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기뻐하며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건 오해였고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마 1:21 ; 요 3:17 ; 계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행 16:31 ; 벧전 1:9).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6:24).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자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베드로의 항변이 있은 직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려고 하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를 욕망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이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왕위에 오르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될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막 9:34).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적인 복이나 명예 등 세상적인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나(요 6:26)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채워지지 않으면 쉽게 실망하며 예수님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부와 명예를 얻는 길도 아니고 가기 편한 넓고 큰길도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힘들고 좁은 길입니다(마 7:14). 자신의 이익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실족하거나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불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길을 걸어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두 사람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눅 24:25).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눅 8:31).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만 생각했지 그분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을 하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후에 두 제자는 눈이 열려 자신과 동행했던 분이 예수님인 줄 알고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막 16:14). ‘완악하다’는 말은 마음이 굳어져 확실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그랬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불신앙은 바로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거나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 역시 무지하고 믿음이 없으며 마음이 완악하다는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기십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 말입니다(행 26:8).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십니다(신 32:39 ; 삼상 2:6). 또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삼상 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실 수 있고, 스스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그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롬 10:9). 그를 믿는 자들 역시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요 11:25). 이 소망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핍박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히 11:35). 우리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세상의 그 어떤 유혹이나 핍박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롬 8:34 ; 히 7:25) 성령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롬 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