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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그런즉 깨어 있으라

2023. 4. 6.
성경본문 보기

[개역개정] 마태복음 25장 1절 ~ 13절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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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주의 재림과 세상 끝날에 있을 징조에 관해 묻는 제자들에게 그때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날과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마 24:36)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마 24:42).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당시의 결혼 풍습을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약혼(정혼)한 지 1년이 되면 결혼을 합니다. 결혼식은 통상 신랑 측이 마련한 장소에서 치러지며(마 22:2 ; 요 2:9),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오면 잔치가 시작이 됩니다. 이때 신랑 일행을 맞이하여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까지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처녀들이 바로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입니다.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신부 측 들러리라는 견해도 있고 신랑 쪽 사람들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오는 시간은 대개 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등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지자 열 처녀는 기다리다 지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 "신랑이 오니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에 잠이 깬 그들은 각자 자기 등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이 없으면 그들은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맡은 역할이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여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랑이 언제 올지 몰라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을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자들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슬기 있는 자들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며 "차라리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했습니다. 같이 쓰기에는 기름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人情)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그들에게는 신랑을 맞이하는 일이 사사로운 정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의 처사는 정당했으며, 따라서 그들을 매정한 사람으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왔습니다.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혔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왔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설사 구했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그들이 와서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을 하자 안에서 들려온 것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한 문답(問答)이 누가복음 13장에 나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눅 13:25).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자신들을 왜 모르냐고 항변합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눅 13:26). 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매어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으며 주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마 7:22).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했는데 왜 모르시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했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겉은 화려해 보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지는 몰라도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거나 악을 행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눅 13:27).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모른다고 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사정은 좀 다르지만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신부 측 들러리가 아니라면 신랑의 지인이거나 그 마을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자신이 맡은 일을 책임지고 잘 수행해야 했습니다. 신부 측 들러리라도 그들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이 어느 쪽 사람이든 신랑과 신부를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까지 인도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신랑이 늦는다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기 있는 처녀들은 이에 대비해서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미려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못했다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만, 안 했다는 것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의 하나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이 그들을 미려한 자들이라고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처녀의 비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기름과 등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 혹은 신랑과 신부로 묘사를 했습니다(고후 11:2 ; 엡 5:31, 32 ; 계 21:2).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신랑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신부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본에서 신부가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에는 없습니다. 대신 열 처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신부가 교회라면 이들은 교회의 구성원인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처럼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이 있고, 가라지의 비유에서처럼 알곡같이 신실한 자들과 가라지같이 외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그물의 비유에서처럼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기에는 다 슬기 있는 자 같고 알곡 같고 좋은 물고기 같지만 세상 끝 날에는 미련한 자와 가라지, 나쁜 물고기로 판명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열 처녀가 준비해야 할 등과 기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등은 그리스도인들의 외적인 삶을, 기름은 내적인 믿음 혹은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마 25:3)는 것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등과 기름을 굳이 비유적으로 해석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등과 기름이 무엇을 가리키든 이 비유의 결론과 핵심은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25:3).

그렇다고 잠을 자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미련한 자들만 잠을 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육체적인 잠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잠을 잔다고 해서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눅 17:34). 미련한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잠을 잤기 때문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영적인 잠, 신앙의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롬 13:11). 한 마디로 영적 각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며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롬 13:12-14) 빛의 자녀들처럼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엡 5:8-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0년 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딤후 4:1). 그날은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날이지만(히 9:28)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날은 밤에 도적같이, 혹은 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한 때에 임할 것이며(마 24:44)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살전 5:2, 3). 그날은 영적으로 한 밤중이 될 것입니다(마 25:6).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그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삼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롬 13:13), 14.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거짓 교훈에 미혹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며 경건 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날을 안일하게 준비하고 있다가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주인에게 외면당하고 잔칫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고 슬기 있는 다섯 처녀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고 있다가 천국 잔치에 모두 참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