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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2023. 4. 3.

성경본문 보기

이사야 53장 1절 ~ 12절[개역개정]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 마을에서 하룻밤 묵으신 예수님께서는 이튿날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이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바 있습니다(마 21:4, 5). 사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은 일반적으로 왕들이 말이나 병거를 타고 입성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위엄도 없고 볼품도 없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사 53:2).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말대로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슥 9:9). 예수님께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사 9:6 ; 슥 9:10 ; 눅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와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 (요 1:45) 곧 메시아 그리스도라 확신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오셨으니 이스라엘은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아놓거나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외쳤습니다(마 21:9).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 혹은 '제발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시 118:25). 교회에서는 이 날을 '종려주일' 혹은 '호산나 주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바람과 달리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죄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무력이 아닌 자기희생 곧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계 1:5).

유대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할 메시아가 오히려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향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믿겠다"고 조롱하며 모욕했습니다(마 27:39-42). 결국 그들에게는 십자가게 못 박힌 그리스도가 신앙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고전 1:23 ; 롬 9:33 ; 벧젼 2:8). 이방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에 있어서 십자가형은 흉악범들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 형벌을 받은 예수가 이방인들에게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아니라 한낱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또 그런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십자가의 도는 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고전 1:18).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신 것은 그분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런 고난과 형벌을 받으셨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 전반부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허물(פֶּשַׁע)이나 죄악(עָוֹן)은 모두 죄를 가리키는 단어들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고의든 과실이든 하나님의 뜻이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롬 6:23) 하나님의 명령을 처음 거역한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창 2:16, 17). 하지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고 아담 역시 그 열매를 먹고 말았습니다(창 3:6). 이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는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롬 5:12). 그러니까 죽음은 죄의 결과요 대가인 셈입니다(롬 6:23).

아담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 역시 죄를 지었습니다(롬 3:23).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입니다(롬 5:19).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표현했습니다(사 53:6). '그릇 행하다'는 말은 '길을 잃다’는 뜻으로 단순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미혹을 받아 곁길로 나간 것을 말합니다(렘 50:6). 양들이 길을 잃는 것은 풀을 뜯어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 풀은 우리로 하여금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해서 결국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의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염려일 수 있고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막 4:19).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목자 되신 주님(시 23:1)의 음성을 외면한 채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담당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으로 하여금 대신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대속입니다(마 20:28).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사 53:8). 단지 그가 자신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사 53:4).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부터 시작되었고 생애 마지막 주간에 그 고난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 주간을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으로 정하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지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요 3:14 ; 12:32, 33). 그리고 그 고통이 어떤지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의 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막 14:34-36). 사실 예수님을 괴롭게 한 것은 육체적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더욱 괴롭고 슬프게 했습니다(마 27:46 ; 갈 3:13). 이는 우리가 받아야 할 처벌로(사 53:4) 그만큼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하며 죄에 대한 징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채찍을 맞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 채찍은 가죽 끈 다발로 만들어졌는데 끈마다 납덩어리를 달아 칠 때마다 살점이 뜯겨 나갑니다. 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5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래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이 상태를 바울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골 1:21). 죄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원수 상태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게 만든 것이 바로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롬 3:23). 죄인이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화목제물로 삼으셨습니다(롬 3:25 ; 요일 4:10). 이로써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고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징계를 받음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죄로 인해 병들고 상처 난 영혼도 치유받았습니다(벧전 2:24, 25).

율법에 의하면 태형은 40대까지만 때리도록 되어 있는데(신 25:3), 미쉬나에 의하면 때린 횟수를 잘못 계산하여 사십을 넘길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39대까지만 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고후 11:24). 그런데 로마 군인들이 이를 지켰을지 의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으셨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채찍을 맞은 다음에는 자신이 매어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보통 가로형틀을 지고 갔으며 그 무게는 40-50kg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채찍에 맞으신 후 십자가 형틀을 지시고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 가셨습니다. 그런데 사형 선고를 받은 빌라도 법정에서 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의 거리는 약 800m였고 경사가 졌기 때문에 형틀을 메고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아 거의 초주검의 상태였기 때문에 형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꾸 넘어지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십자가 형틀을 내려 근처를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지고 가게 했습니다(막 15:21). 그리고 해골이라고 하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갖은 고난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결코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자들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침묵하셨습니다(사 53:7 ; 마 27:12-14).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사 53:12).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죄,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지만(히 4:15)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에게 대신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짓이라고 하면서 그런 잔인한 신은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잔인함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받아야 할 저주를 자기 아들에게 대신 받게 하신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히 9:22).

비록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지만 그 결과인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질고도 슬픔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루어졌으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마 6:10 ; 눅 21:31 ; 빌 1:6).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할 때 죄의 결과인 죽음과 질고와 슬픔은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 21:4). 우리는 그날을 소망하며 현재의 어려움과 아픔을 잘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