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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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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 1절 ~ 12절[개역개정]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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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위선자(외식하는 자)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위선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겉만 보기 좋게 꾸미는 것'으로 속과 겉이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데 있었습니다(마 23:3). 또 율법 외에 세부 규정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마치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마 23:4 ; 행 15:10).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겉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예를 들면 경문을 넓게 하는 것입니다. 경문이란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과 저녁 기도 때 이마와 왼팔에 부착하는 작은 상자를 말합니다. 이 상자 안에는 성경 구절이 적힌 양피지가 들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는 신명기 6장 8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종일 이것을 달고 다녔고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상자를 크게 만들었습니다(마 23:5). 그리고 옷술을 길게 했는데, 옷술이란 옷자락 끝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을 말합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옷단의 네 귀에 청색과 백색 실로 꼬아 만든 술을 달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지키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표식이었습니다(민 15:38-40). 그런데 서기관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처럼 긴 옷을 입고(막 12:38 ; 눅 20:46) 거기에 옷술을 길게 늘어뜨려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경건성을 자랑하기 위함으로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늘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잔치에서 보통 출입구를 기준으로 제일 안쪽에는 잔치의 주인공이 앉고 그 오른편에 가장 귀한 손님이 앉았는데 이 자리가 바로 '윗자리(上席)'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이 자리를 선호했고 이 때문에 종종 자리다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눅 14:7). 이는 바리새인들의 세상적인 욕망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세상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 말 그대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회당의 높은 자리(上座)'는 회당 안에서 사람들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강단 오른편에 있는 자리를 말합니다. 여기에 회당의 지도자와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가 아니라 자리였고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관심사였습니다.

또 그들은 시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로부터 랍비라 불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랍비'란 '나의 선생'이란 뜻으로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덕망을 갖춘 사람들을 부르는 존칭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인사였습니다. 그래서 언제 누구에게 인사를 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했고 높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아서도 안되고 지도자라 불려서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생과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그들은 다 형제이기 때문입니다(마 23:8, 10).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 2:9)으로서 본질적으로 평등한 존재이기에 그들 사이에는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맡은 직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높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화가 임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13절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한 화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하늘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막 1:15). 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강요했습니다. 모세가 말한 대로 율법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완전히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레 18:5 ; 롬 10:5).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규정들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갈 3:11 ; 롬 3:20). 그런데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을 15절의 말씀처럼 구원과는 거리가 먼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마 18: 7).

14절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개역개정]에는 내용이 '없음'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사본의 차이 때문입니다. 난외주에 보면 '어떤 사본에 막 12:40과 눅 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로 그들은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은 특정한 보수가 없어서 후원자들의 기부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들의 호의를 악용했는데, 특히 돈 많은 과부들이 대상이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미혹하여 재산을 착복했으며, 자신들을 신실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오래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행동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꾸미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과 위선과 불법 등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마 23:25-28). 겉모습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 곧 속마음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실도 바른 법입니다(마 23:16).

16절부터 22절은 맹세에 대해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에 대한 화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이나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마 23:16, 18). 하지만 제단이나 성전이나 하늘로 맹세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으로 맹세하든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맹세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셨습니다(마 5:34-37). 물론 맹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우리가 한 맹세가 바르게 지켜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지만 맹세를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맹세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아예 맹세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다음은 23절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 등 곡식이 아닌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해 버렸습니다(마 23:23). 이는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마 23:24). 하루살이는 모기와 비슷하게 생긴 매우 작은 곤충으로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지는 곤충입니다. 반면에 낙타는 가장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둘 다 부정한 동물이었습니다. 하루살이는 포도주 통에 잘 빠졌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채로 걸러냈습니다. 이는 십일조 규례를 철저히 지키기 위해 곡식이 아닌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율법의 더 중요한 부분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는 낙타를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는 소홀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시는데(마 12:7 ; 호 6:6) 바리새인들은 자비를 베푸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제사드리는 데에만 열심이었습니다. 겉모습만 보는 사람들에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범적인 종교인이지만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에게 그들은 위선자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고(마 23:23) 미가 선지자가 말한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미 6:8).

마지막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내려지는 화는 의인과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것에 대한 화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순교한 선지들과 의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이유는 선지자들과 의인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의 길로 가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만일 자신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들 역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핍박함으로써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박해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독사의 자식들로서(요 8:44) 지옥에로의 판결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마 23: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은 제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누가 더 높으냐의 문제로 다투었습니다(막 9:34). 이들의 다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날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눅 22:24).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27).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3:14, 15).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요 종이라고 한다면 섬김을 받거나(마 20:28) 대접받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눅 17:10). 높임을 받기보다는 도리어 낮은 자리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 2:9)으로서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