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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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25절 [개역개정]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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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 곧 가상칠언을 묵상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운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사 53:5).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사 53:6). 죄의 대가는 사망 곧 죽음입니다(롬 6:23). 사람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결과이며(롬 5:12), 이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롬 3:23).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의 대가인 죽음을 우리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시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감내하셨고,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음으로 죄인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고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될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히 12:2).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성전 제사와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고, 이 사이에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출 26:33). 이 휘장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휘장을 통해야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 드리는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히 9:7). 이러한 규례를 어기면 비록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죽임을 면치 못했습니다(레 16:2). 이런 일을 매년 반복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히 9:8).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마 27:51).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라고 했습니다(히 10:20). 따라서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의미합니다(엡 2:14). 이제 더 이상 짐승의 피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했던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 9:12).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히 10:9),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롬 5: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고, 그 결과 무덤들이 열리면서 잠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마 27:52).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게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연 동굴이나 바위를 쪼개어 만든 인공 동굴에 시신을 안치했고(마 27:60), 입구를 큰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요 11:38). 이러한 무덤들이 지진으로 인해 열리고, 잠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5:20).
‘첫 열매’는 유대인의 절기인 초실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초실절은 이스라엘에서 일 년 중 가장 먼저 수확하는 곡물인 보리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레 23:10). 즉, 무교절 기간에 있는 안식일 다음 날, 사람들이 수확한 보리의 첫 단을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 절기가 초실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날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무교절 기간에 있는 안식일 다음 날 곧 초실절에 부활하심으로써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 15:3, 4).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롬 4:25).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실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이나 혹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로봇처럼 단순히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로 만드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을 때(창 2:17)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었고, 반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유혹을 따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짓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도 함께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된 것입니다(롬 5:12). 따라서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고통받는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에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구원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 없는 누군가가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치러야 하는데,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감당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감당케 하셨습니다(사 53:6).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실 뿐 아니라(히 4:5),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십니다(고후 5:21).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담당케 하신 것은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시려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칭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칭의란 ‘의롭다고 여기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집니다(롬 3:2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값을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 곧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 국한된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 15:13-19).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겪는 고난과 희생이 결국은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에 우리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우리는 날마다 부활의 소망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강해할 때 살펴봤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히 11:35하). 믿음의 사람들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심한 고문을 받았음에도 굳이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연명하기보다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문대 위에 묶여 몽둥이로 맞아 죽기도 하고, 사자나 불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특히 네로 황제 때는 신자들의 몸에 역청을 칠하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정원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피해서 광야나 산, 동굴 등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히 11:38). 심지어 카타콤이라고 불리는 지하 무덤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수년 혹은 수십 년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먹을 게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각종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놀라운 구원의 사실을 확증해 주는 사건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으며, 장차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세상은 때로 우리를 유혹하고, 또 낙심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신앙,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고난 앞에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고난 그 너머, 영원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들어지고 마음이 지칠수록 우리의 시선은 더욱 부활하신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친구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34). 그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 두려움이 아닌 믿음으로, 좌절이 아닌 감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그 부활의 생명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 가운데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되기를 바라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