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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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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장 42절 ~ 47절 [개역개정]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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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단어는 ‘교제’ 즉, ‘서로 사귐’을 뜻하는 헬라어로, 어떤 물건이나 경험을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초의 신약 교회였던 예루살렘 교회는 코이노니아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그러면, 당시 코이노니아가 교회에서 어떤 형태로 진행되었는지 살펴봄으로써 오늘날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믿음의 교제

성도의 교제는 세상의 교제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교제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 성도의 교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교제입니다(몬 1:6). 그래서 성도의 교제에는 세상의 교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색이 있습니다.

 

1) 예배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는 성전이었습니다(행 3:11 ; 5:12). 성전에 모이는 것은 그들이 늘 해오던 일이었는데,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절기들뿐만 아니라 하루 세 번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모였습니다(행 2:15 ; 3:1). 더욱이 성전은 수천이나 되는 인원이 동시에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이 성전에 모여서 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 2:42, 46). 한 마디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대표적으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έω)와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가 있습니다. ‘프로스퀴네오’(요 4:24 ; 행 8:27 등)는 ‘존경의 표시로 손에 입을 맞추거나 몸을 굽혀 절하다’는 뜻으로,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창 24:26 ; 출 12:27 둥). 영어의 ‘worship’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는 ‘존경과 존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worth) 존재(ship)’ 혹은 ‘어떤 존재에게 가치를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로부터 존경과 존귀를 받으실만한 유일한 분으로서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예배입니다(시 29:2 ; 96:8 ; 계 5:12). 그리고 ‘라트레이아’(요 16:2 ; 롬 9:4 ; 12:1 ; 히 9:1, 6)는 ‘봉사’ 즉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를 영어로 ‘service’라고도 하는데, 라트레이아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두 단어를 종합해 보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행위’을 말합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예배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최고 신앙적 행위’(헌장 제3장 제1절 제23조)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상의 행위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집니다(요일 1:3).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도 간의 친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영적인 교제 즉 예배가 없다면 비록 성도 사이의 교제라 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친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반드시 예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2) 성만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행 2:46). ‘떡을 떼다’는 말은 성만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9 ; 고전 11:24). 또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22:20 ; 고전 11:25).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릴 때 일정한 형식에 따라 성찬을 행하고 있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애찬의 형태로 이를 시행했습니다(유 1:12).

애찬이란 ‘사랑의 잔치’라는 뜻으로, 당시에는 교인들이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함께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떡을 떼며 주의 만찬을 기념했고, 그다음에 음식을 함께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반대로 음식을 먹은 후에 주의 만찬을 기념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집안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은 좋은 음식을 많이 가져왔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먹을 음식만 겨우 가져왔거나 아예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었습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람이 다 모이기도 전에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취하기까지 했습니다(고전 11:21). 그러면 가난해서 음식을 장만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 굶어야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고전 11:22).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뿐 아니라 거룩한 주의 만찬과 애찬을 세상의 연회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고전 1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교제는 세상의 교제와는 다르고 또 달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성도의 교제가 인간적인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성도의 교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친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골 1:18) 우리는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고전 12:27). 그 안에 이루어지는 성도의 교제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 이해관계를 초월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 아무 차별 없이 함께 코이노니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 12:13).

2. 나눔의 교제

44절과 45절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모든 물건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또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행 4:34-35). 오늘날에도 이런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초대교회와는 다소 차이가 있고, 현실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남미에 주로 서식하는 박쥐 중에 동물의 피를 먹고사는 흡혈박쥐가 있습니다. 이 박쥐는 48~60시간 동안 피를 먹지 못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다른 동료에게 피를 구걸합니다. 그러면 정량 이상의 피를 먹은 박쥐는 그것을 토하여 배고픈 박쥐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이를 거절하면 훗날 자신이 배고플 때 다른 박쥐로부터 피를 얻어먹을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서로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 이것이 바로 흡혈박쥐가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 된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지체가 어려움에 있을 때 외면하지 말고 서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로 도울 수도 있고, 물질이 없으면 위로의 말이나 기도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3. 섬김의 교제

코이노니아와 더불어 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디아코니아(κοινωνία)’입니다. 이 단어는 한글 성경에 주로 ‘봉사’로 번역되었는데, 성경에서는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거나(접대, 눅 10:40) 분배하는 일(구제, 행 6:1) 그리고 ‘섬기는 일’(섬김, 계 2:19)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섬기는 일 즉 봉사입니다(행 1:17, 25 ; 롬 11:13 ; 엡 4:12 ; 고후 8:4 등).

교회의 여러 직분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직분은 아마 집사일 것입니다. 여기서 비중은 중요도가 아니라 수를 말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것이 무엇이든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일에 우열도 없고 상하도 없습니다. 다만 맡은 일이 다를 뿐입니다. 집사를 헬라어로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라고 하는데(빌 1:1), 이 단어는 사환(마 22:13)이나 하인(요 2:5, 9) 등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특히 식사 때 시중드는 사람들을 가리켰는데, 이것이 초대교회에서는 ‘섬기는 자’ 혹은 ‘봉사하는 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에서 디아코니아가 유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식사 때 시중드는 종에 비유하셨는데(눅 17:8), 이는 겸손과 섬김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눅 17:10).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섬길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섬김을 기대하는 건 무리입니다. 그들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섬기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자들이 있는 곳에는 늘 다툼(막 9:34)과 분쟁(고전 11:18)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앞에서 말씀드린 고린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서 성도의 참된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질 리 만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열심히 모였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일에는 무엇보다 희생이 따릅니다. 즉 모이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는 시간의 희생이 따르고 나누는 일에는 재물의 희생이 따릅니다. 이러한 희생이 없이는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참된 교제를 위해서는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로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3:3).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수고를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비하면 그러한 수고와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가 아름답습니다(행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