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음TV/주일예배설교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2023. 2. 13.

성경본문 보기

열왕기상 17장 8절 ~ 16절[개역개정]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설교문 보기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우상 숭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여호와 신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그는 아합 왕 때부터 아하시야 왕 때까지 북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였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디셉 사람으로 길르앗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뿐입니다. 디셉은 엘리야가 아니었다면 언급되지 않았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알려지지 않았을 나사렛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들로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선지자의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제사장 출신도 있었고(렘 1:1), 엘리사처럼 농부 출신도 있었습니다(왕상 19:19). 아모스는 목자 출신의 선지자였습니다(암 1:1).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지자들도 있었고(왕상 13:1 ; 20:13), 미리암이나 훌다처럼 여선지자들도 있었습니다(출 15:20 ; 대하 34:22). 이는 출신과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엘리야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엘리야와 아합

엘리야는 어느 날 느닷없이 나타나 아합 왕에게 재앙을 선고했습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 비나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가뭄의 재앙이었습니다. 강수량이 적은 이스라엘에서 가뭄은 곧 심각한 기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기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창 12:10 ; 26:1 ; 41:57 ; 룻 1:1 ; 왕하 4:38 ; 행 11:28) 몇 년 동안 계속되는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여겨졌습니다(삼하 21:1 ; 왕상 17:1 ; 시 105:16). 엘리야는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임하게 될 가뭄이 일반적인 재해가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바알 숭배에 빠져있던 아합은 엘리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그것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농사의 신이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여겨졌고 가뭄이나 기근 같은 자연재해는 바알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합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엘리야의 말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아합은 엘리야의 예언대로 3년이 넘게 이스라엘에 가뭄이 있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면서도 계속 바알을 숭배했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멸하려고까지 했습니다(왕상 18:4).

아합이 비록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회개하고 돌이켜 여호와 신앙을 갖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보내 그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합은 회개를 했습니다.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은 아합은 자기 옷들을 찢고 몸에 굵은 베옷을 걸쳤으며 금식을 했습니다(왕상 21:27).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할 때 취하는 행동으로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겸손함으로 인해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왕상 21:29).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9 ; 딤전 2:4). 그래서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여러 방법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만(요 1:12),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살후 1:8, 9).

2. 엘리야와 까마귀

아합에게 수년 동안 가뭄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요단 강 동편에 있는 그릿 시냇가로 숨어버립니다. 비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0:16). 뱀은 성경에 간교한 짐승으로 소개되기도 하지만(창 3:1) 지혜로운 동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을 만났을 때 지혜롭고 신중하게 대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다른 동네로 피하는 것입니다(마 10:23).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위험에 처하면 종종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했습니다(행 9:25 ; 14:6). 이처럼 할 수만 있으면 어려움이나 박해를 피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핍박에 벗어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거나 예수님을 배신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심지어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절개, 신앙의 순결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릿 시냇가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가져다준 떡과 고기를 먹었으며 또 시냇물을 마셨습니다. 까마귀는 부정한 것으로 분류되어 제사는 물론이고 식용으로도 금지된 동물입니다(레 11:15 ; 신 14:14).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들로 하여금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하도록 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인 까마귀를 통해 선지자를 도우실리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까마귀들(히, 오르빔)이 그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아랍인들(히, 아르빔)이나 상인들(히, 오리빔) 혹은 오렙 사람들(히, 오레빔)의 오기라고 봅니다. 엘리야가 까마귀가 아닌 상인들이나 아랍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까마귀들이 직접 먹을 것을 갔다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장해 놓은 음식물을 엘리야가 가져다 먹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정한 짐승이라고 해서 접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기를 먹거나 그 사체를 만지지 못할 뿐입니다(레 11:8). 나귀 역시 부정한 동물이었지만 짐을 운반하거나(삼상 25:18 ; 느 13:15)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삿 10:4 ; 삼상 25:42 ; 요 12:4). 하나님께서는 까마귀가 아닌 천사나 비둘기를 통해 엘리야에게 음식을 공급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광야 한 로뎀나무에 있을 때에는 천사를 통해 음식을 제공하셨습니다(왕상 19:5-8). 그렇게 하실 수 있음에도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부정한 짐승인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를 도우셨을까요? 이는 뒤에 살펴볼 사르밧 과부와도 연결이 되는데,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을 고발하는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정한 짐승이나 이방인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까마귀와 이방인이라고 업신 여기는 사르밧 과부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지자를 도와주게 함으로써 정작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부정한 것은 까마귀나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로 인해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딤후 3:12).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고 하셨겠습니까.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만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히 12:1).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렵다고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신앙 밖으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시 146:5).

3.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지 얼마 후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시냇물까지 말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시돈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조국이고 바알 숭배의 본거지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르렀을 때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먹을 것이라고는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밖에 없었습니다. 나뭇가지를 주워다가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결국은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그 주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시돈 사람들 역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인은 매우 관대했습니다. 보통 삶이 어려우면 성격도 예민해지기 마련인데, 이 여인은 낯선 사람이 자기에게 마실 물을 갖다 달라고 청했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기꺼이 물을 가지러 갔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마실 물이 귀했지만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할 때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먹을 것도 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녀에게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약간의 기름 외에는 없었고 그것으로는 그녀와 아들이 먹기에도 부족했기에 사정을 얘기했지만 엘리야는 먼저 그것으로 자신을 위해 빵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여호와임을 알고 있었습니다(왕상 17:12). 하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야의 말에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는지 아니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하신 말씀같이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병들어 죽은 아들이 엘리야의 기도로 살아난 것을 보고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과 엘리야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왕상 17:24). 사르밧 과부는 이방 사람으로 바알 우상의 본거지에서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고, 이방 민족이라고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에도 가뭄으로 인해 고통받는 과부들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르밧(사렙다) 과부에게 보내사 그 집을 구원케 하셨습니다(눅 4:25, 26).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다고 여겼지만(행 11:18)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롬 3:22). 복음에는 순서가 있지만 결코 차별은 없습니다. 또 예수님을 얼마나 믿었는지 교회는 얼마나 다녔고 어떤 직분을 받았는지는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래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십자가의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로부터 음식을 공급받았고, 시돈에서는 이방인 과부로부터 음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혹 외롭다고 느낄 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