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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

2023. 2. 2.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21장 1절 ~ 11절[개역개정]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에서 2-3km 떨어진 베다니에 이르신 때가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요 12:1). 베다니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감람산 기슭에 있었고, 위쪽으로 벳바게라는 마을이 있습니다(눅 19:29). 이튿날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막 11:2)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마 21:2, 3). 맞은편 마을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사실 그 마을이 어디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왜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이유를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마 21:4, 5).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왕들이 입성하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말이나 병거를 탔지만 예수님께서는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짐승이고 모습도 말과 비슷하지만 몸집은 말보다 작습니다. 당시에는 주로 짐을 운반하는 일에 사용되었고(삼상 25:18 ; 느 13:15), 사람이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기도 했습니다(삿 10:4). 그런데 어린 나귀는 왕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위엄도 없고 볼품도 없어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사 53:2).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말대로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지만(요 1:1)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십니다(빌 2:5-8).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와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맞으러 왔습니다. 그중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얘기를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요 12:11, 18).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요 1:45) 곧 메시아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오셨으니 이스라엘은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 놓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깔아놓거나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앞뒤에서 따르는 사람들이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마 21:9). 호산나는 '이제 구원하소서' 혹은 '제발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시 118:2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온 성이 들끓었습니다.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누구냐'고 묻자 다른 사람들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해마다 지켜야 할 절기들이 있고 그중에서 무교절(막 14:12)과 맥추절 그리고 수장절에는 성전에 모여야 했습니다(출 23:14-17 ; 신 16:16 ; 대하 8:13). 무교절은 유월절로 시작이 되기 때문에(막 4:12) 무교절을 유월절이라고도 했습니다(눅 22:1). 이 절기에는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디아스포라(διασπορά), 약 1:1 ; 벧전 1:1]도 참석을 했습니다(행 2:5).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자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것이고, 아마 그들 중에서 '그가 누구냐' 물었을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에 모여있는 사람들 중에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생각했습니다(마 16:14). 그래서 '그가 누구냐'는 질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이고 나사렛은 그 지역의 한 마을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기준으로 볼 때 갈릴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지역이었고, 나사렛은 성경[구약]에도 언급되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심지어 나사렛은 같은 갈릴리 사람들에게 조차 업신여김을 당하는 동네였습니다(요 1:46).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나사렛이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살던 곳이었고(마 2:23),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마 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나사렛 앞에 갈릴리를 덧붙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갈릴리라는 지명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할 때 갈릴리가 빠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선포하신 곳도 갈릴리였고(마 4:17), 부활 이후 제자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곳도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유대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이방의 갈릴리'(사 9:1 ; 마 4:15)라 불리며 멸시를 받던 곳이었습니다(요 7:52). 이런 곳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돈과 권력이 있어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자들이 아니라 천대받고 죄인처럼 취급받던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그래서 그런 자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로 인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었지만(마 11:19 ; 눅 7:34)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어째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라는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시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응대하셨습니다(막 2:17). 의사의 도움이 필요한 자는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입니다. 때문에 의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병자들 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롬 3:10), 그러기에 모두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이지만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도, 영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어느 누구보다 율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지키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섬김보다 자비와 긍휼을 더 원하고 계십니다(호 6:6 ; 마 12:7). 그런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뜻은 저버린 채 형식적인 의식에만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마 9:13)고 책망하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이 죄인 취급했던 사람들에게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갈릴리 그곳도 같은 갈릴리 사람들조차 무시하는(요 1:46)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던 메시아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지만 스스로를 낮추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히 10:20).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요 3:16).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실패자로 보일 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던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닌 그냥 죄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를 외치며 열렬히 환영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말을 무시하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만(요 1:12),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살후 1:8, 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여(벧후 3:9)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딤전 2:4). 아직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마시고 늦지 않게 예수님께 나오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