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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2023. 1. 11.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19장 16절 ~ 30절[개역개정]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설교문 보기

하루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마가와 누가는 선생님 앞에 '선한'이란 단어를 덧붙였습니다(막 10:17 ; 눅 18:18). 이 사람은 유대인 지도자[관리, 눅 18:18]로 큰 부자였습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권력과 명예 그리고 재물을 얻었지만 늘 마음 한 켠이 불안했습니다. 그는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계명들을 지키는 등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고,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청년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 19:17). 마가와 누가는 조금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 눅 18:19).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만이 선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선하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자신을 잘 보이려는 아부성 발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지적하시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선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항상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없기 때문입니다(전 7:20).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신 27:26). 그런데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규정들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갈 3:11 ; 롬 3:20). 그런데도 이 청년은 선한 일들 곧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계명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지키라고 하신 계명들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으로 십계명의 후반부인 사람을 향한 의무를 규정한 계명들입니다. 여기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위기의 계명을 덧붙이셨습니다(레 19:18). 마가는 레위기의 계명대신 "속여 빼앗지 말라"(막 10:19)는 계명을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첫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2)인 다섯 번째 계명을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지만 사람에 대한 의무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습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중에 '고르반(코르반, קָרְבָּן)'이란 말이 있는데,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란 뜻입니다(레 1:2). 장로들의 전통[미쉬나]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합니다(막 7:11). 부모를 공경하는데 써야 할 돈을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하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께 대한 의무만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또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청년도 이들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들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습니다(막 10:20). 그리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해 지기를 원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괴로워하고(막 10:22)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 청년에게 많은 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히브리인의 복음서'라는 문서에 좀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부자 청년은 자기 머리를 긁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율법과 예언을 다 지켰다고 할 수 있느냐 율법에 기록되기를 너희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늘 보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너희의 많은 형제들이 누더기를 걸치고 굶어 죽어 가는데 네 집에는 좋은 보물이 가득하여도 형제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안 내어놓지 않는가'. 부자 청년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단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 증언하지 않고, 속여 빼앗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사랑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약 1:27).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막 10:21 ; 눅 18:22)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기 원했지만 자신에게 있는 재물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그는 자신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질 재물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흔히 성벽이 있는 도시에는 보통 큰 문과 작은 문이 있습니다. 큰 문은 낮에 사람이나 짐수레 등이 다녔으며, 작은 문은 밤에 사용되는 것으로 사람이 서서는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았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문을 가리켜 '바늘귀 문'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반면에 낙타는 유대인들이 가장 큰 짐승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몸집이 큰 낙타가 입구가 작은 바늘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은 채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바늘귀라 불리는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탈무드에는 불가능한 일을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늘귀가 작은 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바늘구멍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낙타는 헬라어로 ‘카멜로스(κάμηλ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배를 끄는 밧줄의 헬라어 ‘카밀로스’와 발음이 매우 비슷합니다. 그래서 카멜로스를 낙타가 아닌 카밀로스 즉 밧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굵은 밧줄을 바늘귀에다 꿰는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낙타든 밧줄이든 바늘귀로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자는 무엇이나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어려움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하나님보다 더 돈을 의지하게 되며 하나님 없이도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결국 부자에게 있어서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우상입니다. 또한 재물은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는 말씀처럼 사람을 이 세상에 집착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세에 만족해하며 내세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한 마디로 세상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낙타가 짐을 내리고 무릎을 꿇은 채로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처럼 부자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됩니다. 그런 인물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으로 부자였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구원받았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눅 19:8, 9).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도 그랬고,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도 그랬습니다(요 19:38, 39). 이처럼 부자라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돈에 집착하는 한 그들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를 하나님의 복으로, 가난을 하나님의 저주로 여기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 19:24)고 하시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사람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얻을 수 있습니다(마 19:2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그 누구보다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전 1:2).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가지고 온갖 것들을 다 이루어 놓았지만 그것들을 영원히 누리며 살 수 없다는 것과 그런 것들이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후에 없어질 이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의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재물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그리고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세계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씁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며(약 2:22, 2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롬 12:1, 2). 우리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의 것들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