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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주일예배설교

슬픈 노래, 활 노래

2022. 7. 21.
성경본문 보기

사무엘하 1장 17절 ~ 27절 [개역개정]
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설교문 보기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사울은 왕위에 오른 지 사십 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오게 됩니다(행 13:21).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의 세 아들들과 함께 전사를 했는데, 이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결과였습니다(삼상 16:1 ; 삼하 6:21). 이에 대해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삼상 31장과 삼하 1장은 사울의 죽음과 그에 대한 다윗의 반응 등 사울의 죽음 직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신앙보다 개인의 명예를 더 중요시 한 사울

사울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신앙보다 명예를 중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 족속과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하셨을 때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습니다. 이는 사울이 아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념비를 세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삼상 15:12).

뿐만 아니라 아말렉 사람들의 가축 가운데 좋은 것들은 남겨 두었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삼상 15:24).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이라고 거짓 변명을 했습니다. 여기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이 나왔습니다(삼상 15:22). 사무엘은 사울을 책망하면서 이 일로 하나님이 사울의 왕위를 폐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마지못해 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체면도 있으니 함께 가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삼상 15:30). 하나님께 인정받지는 못해도 사람에게 인기는 얻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신앙보다 명예를 더 중요시했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31장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자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자신을 찌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할례받지 않은 자들 곧 블레셋 사람들에게 능욕당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기를 든 자가 두려움 때문에 이를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한 것입니다. 만일 사울이 명예보다 신앙을 더 중시했더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세상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도 있지만 세상이 알아주는 명예로운 이름보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2. 은혜를 잊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

사울이 죽은 다음 날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긴 후 머리는 다곤의 신전에 매달아 두고(대상 10:10) 갑옷은 아스다롯 신전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이 소식이 길르앗 야베스에 전해지자 모든 용사들이 벧산까지 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불사르고 그의 뼈들을 상수리나무에 속한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일 동안 금식을 했습니다(31:13 ; 대상 10:1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렇게 행한 것은 사울에게 받았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받은 사울은 제비뽑기를 거쳐 정식으로 왕에 선출되었지만 일부 백성들로부터는 왕권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사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평상시와 같이 짐승 떼를 돌보면서 지냈습니다. 그때 암몬 족속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략하자 야베스 사람들은 그들과 화평조약을 맺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암몬 왕 나하스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빼내어 온 이스라엘을 욕보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하스는 자신의 조상이 이스라엘의 사사 입다에게 당한 수모(삿 11:32, 33)을 갚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암몬 족속을 물리쳤고(삼상 11:1-11)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울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치러주었고 일주일 간 금식하며 애도함으로써 받은 은혜에 보답을 했던 것입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는 속담처럼 원수나 원한은 빨리 잊어야 하지만 은혜는 쉽게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것이죠.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배은망덕이라고 합니다. 짐승도 은혜는 갚는다고 하는데 사람이 은혜를 모른다면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 은혜를 받았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3.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려 한 아말렉 사람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을 무찌르고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에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쳐 나온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는 아말렉 사람으로 이스라엘 군대에 고용된 용병이거나 이스라엘에 귀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에게 사울이 죽은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그는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갔다가 사울 왕을 만났는데, 사울 왕이 자신에게 고통이 심하니 죽여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는 왕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이 쓰고 있던 왕관과 팔찌를 가져왔습니다.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이었을까요?

그의 주장은 삼상 31장과 배치됩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사울은 스스로 자결을 했습니다. 더욱이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 의해 죽임 당할 것을 두려워했던 사울(삼상 31:4)이 아말렉 사람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했다는 것(삼하 1:9)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말렉 사람의 주장은 장차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입니다. 그는 사울의 죽음을 이용하여 큰 상급을 받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고 했던 아말렉 사람은 상급은 고사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기 때문입니다(삼하 1:14, 16). 실제로 그가 사울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본인 스스로 사울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실대로 얘기를 했다면 당연히 죽지는 않았을 것이고 계속 이스라엘에 남아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말렉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슬퍼하거나 안타깝게 여기지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4. 원수의 죽음을 슬퍼한 다윗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던 원수와 같은 사울이 죽었을 때에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며 금식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위한 애가를 지어 유다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노래를 '활 노래'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활'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가르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은 수 10장(13)에도 언급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슬퍼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 이방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으므로 그의 죽음은 곧 이스라엘의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영광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1:19).

사실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게 있어서 고달픈 망명 생활을 끝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뻐하기는커녕 슬퍼했다는 것은 그의 신앙뿐만 아니라 인격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잠언 기자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잠 24:17). 원수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좋아하지 말고 그의 불행을 쌤통이라며 고소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의 진노를 원수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자에게로 옮기실 시도 모릅니다(잠 24:18).

사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원수일 수 있습니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넘어지고 엎드러질 때 즐거워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진노의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죠. 죄를 지음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롬 5:8 ; 골 1: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대속제물로 그리고 화목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딤전 2:6 ; 롬 3:25 ; 갈 1:4). 우리를 위해 하나뿐인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9, 16).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엡 5:2).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법인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사울처럼 신앙보다 개인의 명예를 더 중요시하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삼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취하려 했던 아말렉 사람같은 자도 있습니다. 반면에 은혜를 돌에 새기고 그 은혜를 갚으려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나 원수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다윗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나 아말렉 사람처럼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 재물을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다윗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과 길르앗 야베스처럼 보은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