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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예음TV/주일예배설교 2022.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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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장 8절 ~ 15절 [개역개정]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설교문 보기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은 엔게디로 갔습니다. 엔 게디는 ‘어린[새끼] 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유대광야 동쪽 끝자락, 염해 서쪽 해안가에 있는 지역입니다. 협곡으로 된 이 지역은 위는 광야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사해라고 불리는 소금바다, 염해가 나옵니다. 이곳에는 여러 샘들이 있어 물이 풍부하고 나무와 풀이 많아 사반이라 불리는 바위너구리나 사슴 특히 야생염소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런 동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와서 여러 날 머물며 풀을 먹였기 때문에 길 옆에는 여기저기 양의 우리가 있었고, 자연동굴도 많아 목자들이 거주지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은 정예병 삼 천명을 거느리고 엔게디로 가서 들염소 바위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그곳 길가에는 양우리들이 있었고 그 근처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사울은 용변을 보기 위해 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 굴 안 쪽에는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며 다윗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삼상 24:4)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치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신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사울을 죽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 것은 잘못입니다.

대게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우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그일라 성읍에 들어갔을 때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삼상 23:7) 이는 사울의 자기중심적 이해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습니다.

분명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그것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했지만 다윗은 그 속에 담겨있는 혹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 이유인데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일어나 사울에게 가서 몰래 그의 겉옷 자락을 베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겉옷 자락만을 베려고 그에게 갔는지 아니면 그를 죽이려고 갔다가 겉옷 자락만 베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죽일 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란 히브리어로 '마쉬아흐(메시야)',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그리스도)'라고 합니다(요 4:25).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은 제사장(출 28:41)과 왕(삿 9:8)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였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9:16 ; 10:1 15:1).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울을 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은 아마도 11절의 고백처럼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조차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그의 마음이 그를 찔렀기 때문에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였고,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울을 죽였다면 그는 도망자로서의 고달픈 삶을 마감하고 왕으로서의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다윗은 사람들에게 성군으로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를 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반역자라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당초 다윗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권력을 얻느니 차차리 일개 목자로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더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시 84:10)고 했던 한 고라 자손의 고백처럼 다윗 역시 그런 삶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둘째,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 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왕 사이에 심판하실 것이며(15), 자신을 위해 왕에게 보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12). 한 마디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우리가 원수에게 해야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3, 44).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사울이 다윗에게 말한 것처럼 그를 평안히 가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24;19).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당연히 보복의 요청이 아니라 원수가 용서받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눅 23:33).

'원수를 사랑한다’란 말은 자신에게 정신적 혹은 물질적인 피해를 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잠언(25:21)을 인용하면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말이 쉽 지지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확실한 방법은 바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상태를 바울은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롬 5:10). 죄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아들은 사랑하며, 원수를 희생해서 아들을 유익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원수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 5: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람들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폈습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다시 험난의 길을 가야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온다고 해도 같은 판단과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삼 26장에서 다윗은 또 한 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그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이는 시편 57편에 나와 있는 기도로 그가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사람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살펴야 합니다. 보이는 현상만 바라보지 말고 그 속에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처럼 그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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