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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열린다 성경' 시리즈

2018. 11. 24.

저자 류모세 / 출판사 두란노 / 발매 2010.04.09. > 상세보기

이 책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한 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주석이나 사전처럼 설교를 준비하거나 연구할 때 수시로 참고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정답'은 아닐 것이다. 틀린 내용도 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들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Photo by Yeum

<절기 이야기> 중에서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 벳새다로 자리를 피하셨다. 벳새다는 헤롯 빌립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헤롯 안티파스의 마수가 미치는 못하는 곳이다. 특히 빌립의 아내를 안티파스가 취함으로써 이복형제 사이는 급속도로 소원해진 상황이었다. 세례 요한의 죽음도 안티파스의 불륜적 결혼이 부당함을 지적했다가 빚어진 일이었다. 결국 벳새다는 헤롯 안티파스를 떠나는 예수님에게 최고의 망명지였던 것이다." (위 책 p. 54) 

안디바(헤롯 대왕의 네 번째 부인 말다케에게서 태어난 아들)가 취한 헤로디아는 당시 벳새다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빌립 2세(헤롯 대왕의 다섯 번째 부인 클레오파트라에게서 태어난 아들)의 아내가 아니라 헤롯 대왕의 세 번째 부인 마리암네 2세에게서 태어난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이다. 따라서 헤롯 빌립 2세가 이복형인 헤롯 안디바와 아내 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질 이유가 없다. 

 

헤롯왕조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헤롯(King Herod the Great)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사람 안티파터(Antipater) 2세의 둘째 아들로 BC 73년경에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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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야기> 중에서 
"성경은 분명 이스라엘 역사의 주 무대였던 척박한 동쪽 무대를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부르고 있다.’"(위 책 p. 282)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남쪽으로 광야에서부터 북쪽으로 레바논까지이며, 동쪽으로는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지중해까지이다(신 11:24).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다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은 분명 가나안 전체를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부르고 있다(창 15:18 ; 17:8 ; 출 3:8, 17 ; 13:5 ; 23:31 ; 민 13:21 ; 34:2-12 ; 신 1:7 ; 수 1:4). 

 

가나안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까

성경은 가나안 땅을 가리켜 '아름답고 광대한 땅'(출 3: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17 ; 출 13:5 등),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겔 20:6, 15)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성지 순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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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이야기> 중에서
"성경을 살펴보면 진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애굽으로 표현하고 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 16:13). 위 말씀은 고라의 반역에 가담한 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들의 불평의 요지는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어 황량한 광야 이스라엘에서 주려 죽게 한다는 것이다." (위 책, p.283). 

다단과 아비람의 불평은 가데스 사건으로 인해 가나안 입성이 불허(不許)된 데 기인한 것으로 그들이 언급한 광야는 이스라엘(가나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민 14:25 ; 신 2:1). 또 다단과 아비람이 애굽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은 조롱 섞인 표현이다. 그들은 모세가 감언이설로 이스라엘 백성을 농락했다고 비난하며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민 16:14). 

이 책뿐만 아니라 다른 저자의 책도 매한가지일 것이다. 어찌 수천 년 전의 일들을 현 시점에서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경[번역본]도 오류[오역]가 있다. 심지어 개역개정판은 개정(改正)이 아니라 개악(改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오역(誤譯)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오역이 아니라 관점이 다른데서 생기는 표현의 차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마디로 표현이 다를 뿐이지 의미는 같다는 것이다. 

· 이 글은 티스토리 '세상을 품은 참새'(2013.05.06) 게시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