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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예음TV/설교 2022. 6. 26.
본 문 고전 15:1-8 2022년 4월 17일
부활주일
제 목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시 청 YouTube : https://youtu.be/oNJjdnhVCB8
KakaoTv : https://tv.kakao.com/v/428069874
본 문 벧후 3:8-13 2022년 4월 24일
제 목 주의 약속
설교문 보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계 1:5),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들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행 1:3). 그리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곧 보혜상 성령(요 14:16, 17, 26 ; 15:26 ; 16:7-14)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11)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들에게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 요 14:4). 사실 재림에 대한 약속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바 있습니다(단 7:13).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이 있은 지 200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주의 재림이 없다거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또 재림에 대한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벧후 3:4).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주님께서는 자기의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벧후 3:9). 바울 역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했습니다(딤전 2:4).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에 이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벧후 3:15).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결국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살후 1:9).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거나 더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미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자칭 재림예수라고 하는 자들이 수 십 명에 이르고 그중에 상당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히 9:27) 누구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 24:5)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26)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그리스도가 나타날 장소로 알려져 있었고 선지자들의 주 활동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사가인 요세푸스에 의하면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광야를 무대로 사람들을 미혹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행 21장에 언급된 이집트 사람입니다(21:38). 반면에 골방은 은밀한 장소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거짓 그리스도 혹은 선지자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에 자칭 재림예수라고 하는 자들이 수십 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몇 명을 제외하고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광야든 골방이든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누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번개에 비유하셨습니다.

번개가 동쪽에서 번쩍이면 서쪽까지 번쩍임 같이 그리스도가 임하는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마 24:27). 예수님이 처음 세상에 오셨을 때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오실 때는 그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전해주고 알려주고 설명해 주어야만 인지할 수 있는 은밀하거나 애매한 형태가 아니라 번개가 동쪽에서 번쩍이면 서쪽까지 번쩍임 같이 누구나 분명하게 알고 볼 수 있도록 오시기 때문입니다(계 1:7).

하지만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마 24:36). 그런데도 재림의 날을 예고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미선교회’입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 다미선교회를 비롯한 시한부종말론자들은 그날 그 시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고 그를 믿는 자들은 휴거가 될 것이라고 확신을 했습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땅에 임하시기 전 공중에 머무시는데 이때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변화를 받아 공중으로 끌어올려져 주를 영접하게 되는데(살전 4:16-18) 이것을 ‘휴거’라고 합니다. 그들은 밤 10시부터 각 처소에 모여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주변에 모였고, 방송에서 이를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고 날은 점점 밝아오는데 휴거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이가 없는 것은 당시 다미선교회의 회장이었던 이장림씨 본인은 정작 10월 28일 휴거설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모두 불발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신 일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를 한 비유를 통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3, 44)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아르센 뤼팽처럼 언제 어디서 어떤 물건을 훔치겠다고 미리 예고를 하는 도둑은 없습니다. 만일 집 주인이 언제 도둑이 올지 알고 있다면 그가 와서 물건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인은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또 재림의 시기를 노아의 때와 비교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6)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홍수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달했지만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세속적인 일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노아가 전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노아의 때와 같을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도래할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역시 그의 서신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온다고 했고(벧후 3:10), 바울도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의 재림은 밤에 도적같이 그리고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같이 갑자기 이를 것이라고 언급했습니다(살전 5:2, 3). 그런데 바울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라” (살전 5:5). 이 구절은 종종 재림의 날짜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우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재림의 때와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성도들에게 갑자기 닥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항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날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실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에 주가 임하실지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마 24:42 ; 25:13). 바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했습니다(살전 5:6). 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실제로 밤에 자지 않고 불침번을 세우는 제도까지 마련했었다고 합니다. 사실 잠이라고 하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잠을 자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영적인 각성을 의미합니다. 노아 때의 사람들처럼 세상 일에만 몰두하지 말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술 취하지 말고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뜻으로 올바른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삼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벧전 4:7).

둘째,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자칭 그리스도라하는 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많이 출현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끊임없이 있어 왔지만 말세가 되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 혼란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벧후 3:18). 또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앙의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엡 4:27). 무엇보다 그런 자들에게 미혹되지 않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목적은 우리가 매주마다 고백하는 것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딤후 4:1). 그날은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의 날이지만(히 9:28)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은 밤에 도적같이, 혹은 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이를 것이며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살전 5:2, 3). 우리가 비록 그날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말세의 징조들이 현재 일어나는 것을 보며 예수님의 재림이 멀리 않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일에 정신을 팔지 말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삼가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경건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속히 오리라’ 하실 때에 사도 요한처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할 수 있도록 그날을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계 22:20).

본 문 삼상 24:8-15 2022년 5월 1일
제 목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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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은 엔게디로 갔습니다. 엔 게디는 ‘어린[새끼] 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유대광야 동쪽 끝자락, 염해 서쪽 해안가에 있는 지역입니다. 협곡으로 된 이 지역은 위는 광야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사해라고 불리는 소금바다, 염해가 나옵니다. 이곳에는 여러 샘들이 있어 물이 풍부하고 나무와 풀이 많아 사반이라 불리는 바위너구리나 사슴 특히 야생염소들이 많이 서식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런 동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목자들이 양들을 데리고 와서 여러 날 머물며 풀을 먹였기 때문에 길 옆에는 여기저기 양의 우리가 있었고, 자연동굴도 많아 목자들이 거주지로 사용하곤 했습니다.

다윗이 엔게디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은 정예병 삼 천명을 거느리고 엔게디로 가서 들염소 바위 근처에 이르렀습니다. 그곳 길가에는 양우리들이 있었고 그 근처에 굴이 하나 있었는데, 사울은 용변을 보기 위해 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 굴 안 쪽에는 다윗과 그의 일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며 다윗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삼상 24:4)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치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신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를 사울을 죽이라는 명령으로 이해한 것은 잘못입니다.

대게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우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그일라 성읍에 들어갔을 때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기 손에 넘기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삼상 23:7) 이는 사울의 자기중심적 이해에서 비롯된 착각이었습니다.

분명 사울이 용변을 보기 위해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에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그것도 자기중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했지만 다윗은 그 속에 담겨있는 혹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려 하지 않았던 이유인데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는 일어나 사울에게 가서 몰래 그의 겉옷 자락을 베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겉옷 자락만을 베려고 그에게 갔는지 아니면 그를 죽이려고 갔다가 겉옷 자락만 베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죽일 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란 히브리어로 '마쉬아흐(메시야)',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그리스도)'라고 합니다(요 4:25).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음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은 제사장(출 28:41)과 왕(삿 9:8) 그리고 선지자(왕상 19:16)였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삼상 9:16 ; 10:1 15:1). 하나님을 대신하여 여호와의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릴 권한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런 사울을 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조차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은 아마도 11절의 고백처럼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 자신에게 죄가 없음을 증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조차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모욕하는 일이라고 그의 마음이 그를 찔렀기 때문에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더 귀를 기울였고,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다윗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울을 죽였다면 그는 도망자로서의 고달픈 삶을 마감하고 왕으로서의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다윗은 사람들에게 성군으로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를 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반역자라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있어서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까지 권력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애당초 다윗은 권력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권력을 얻느니 차차리 일개 목자로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더 행복해했을 것입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시 84:10)고 했던 한 고라 자손의 고백처럼 다윗 역시 그런 삶을 소망했을 것입니다.

둘째, 심판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 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왕 사이에 심판하실 것이며(15), 자신을 위해 왕에게 보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12). 한 마디로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우리가 원수에게 해야 할 일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43, 44).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사울이 다윗에게 말한 것처럼 그를 평안히 가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24;19).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당연히 보복의 요청이 아니라 원수가 용서받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눅 23:33).

'원수를 사랑한다’란 말은 자신에게 정신적 혹은 물질적인 피해를 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잠언(25:21)을 인용하면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행과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말이 쉽 지지 실행에 옮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확실한 방법은 바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담이 죄를 범한 이래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상태를 바울은 '우리가 원수가 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롬 5:10). 죄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아들은 사랑하며, 원수를 희생해서 아들을 유익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원수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 5: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람들의 뜻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폈습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다시 험난의 길을 가야 했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온다고 해도 같은 판단과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삼 26장에서 다윗은 또 한 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그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이는 시편 57편에 나와 있는 기도로 그가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사람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감정이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살펴야 합니다. 보이는 현상만 바라보지 말고 그 속에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처럼 그의 길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본 문 삿 2:6-10 2022년 5월 8일
가정주일
제 목 다른 세대
시 청 YouTube : https://youtu.be/5DFNlsJvSaY
KakaoTv : https://tv.kakao.com/v/428583908
본 문 삼상 25:23-26 2022년 5월 15일
제 목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본 문 삼상 27:1-7 2022년 5월 22일
제 목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시 청 YouTube : https://youtu.be/43G0Zbo-fRM
KakaoTv : https://tv.kakao.com/v/428968526
본 문 삼상 28:1-7 2022년 5월 29일
제 목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설교문 보기

쫓고 쫓기는 사울과 다윗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처지는 달랐지만 그들이 위기를 맞은 이유는 똑같습니다. 둘 다 신앙 밖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신앙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신앙 밖에 있다고 해서 다 잘못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욥처럼 신앙 안에 있어도 고난을 겪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신앙 밖에 있어도 만사형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사울은 분명 신앙 밖에 있었고 그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자세한 내막을 다윗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망명을 했습니다(27:2). 전에도 가드 왕에게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다가 쫓겨났었습니다(21:15). 그런 수모를 겪었음에도 또다시 갔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육백 명의 군사들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2~3 천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도피생활을 계속하다가는 결국 붙잡히게 될 것이라 생각한 다윗은 수모를 무릅쓰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사울에게 붙잡혀 죽느니 차라리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기스는 다윗의 일행을 순순히 받아주었습니다. 그동안 다윗이 계속 사울에게 쫓겨다닌 것과 처음과는 달리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는 점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만 하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자신의 신복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한 아기스는 최대한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거주할 성읍을 달라고 요청했을 군말 없이 시글락을 내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시글락에 거주하면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노략했습니다. 이를 은폐하기 위해 다윗은 그곳 사람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않고 모두 죽였습니다. 이들은 블레셋보다는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아기스는 분명 다윗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블레셋에서 추방당하고 또다시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될 것을 우려한 다윗은 이 사실이 아기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그곳 사람들을 모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스에게는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을 침노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겝은 남부라는 뜻으로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은 유다 남부 지역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네겝을 침노했다고 한 다윗의 대답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을 숨기고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한 말이므로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일 년 사 개월을 블레셋에 머물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다윗이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기간이 다윗에게는 기도와 찬양이 메마른 시기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다윗은 신앙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었으며 이는 근본적으로 다윗이 신앙 밖에 있었기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에 머무는 동안 두 번의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 번째 위기는 다윗이 블레셋 편에 서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과 전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모으자 아기스가 다윗에게 참전을 요구합니다. 다윗은 아기스의 도움을 받고 있던 터라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과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다소 애매한 답변을 합니다.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28:2).

대부분의 번역본은 이를 긍정적인 답변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아기스 역시 다윗이 자신의 요구에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을 자신의 머리 지키는 자 곧 시위 대장으로 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의 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게 될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시적으로나마 신앙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피해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 나라, 그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에 망명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끝까지 이스라엘 땅 곧 신앙 안에 머물러야 할 다윗이었지만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신앙 밖으로 나가 세상과 타협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신앙 밖으로 나가면 더 큰 고난과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끝까지 신앙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신앙 밖에 있었던 사울에게 찾아온 위기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 진 친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꿈, 우림, 예언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시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미래에 일어나 일들에 대하여 꿈으로 보여 주셨고(창 37장) 야곱이나(창 28:12-15 ; 31:11-13) 솔로몬도(왕상 3:5-14 ; 9:2-9) 꿈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신약시대에도 꿈은(마 2:12, 13, 22) 예언과(롬 12:6 ; 고전 14:1) 함께 여전히 계시의 한 방법입니다(행 2:17). 그러나 꿈이나 예언 중에는 거짓도 많고(렘 29:8, 9) 별 의미없는 것들(전 5:3)도 있기 때문에(렘 23:25, 26), 그것을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을 쫓다 보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기 쉽고 또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불순한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것을 완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연연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전도서 기자의 말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전 5:7).

사울은 평상시에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대상 10:14). 그는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사람에게 인기 얻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왕위에 오르기 전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길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15:17).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변해갔고, 끝내는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돌아서게 됩니다. 완전히 신앙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회개의 기회도 있었지만 살리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15:23).

그런 그가 위기를 만나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만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찾고 그분이 가까이 계실 때에 불러야 했었는데(사 55:6)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입니다(15:26 ; 16:14). 그러자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전에 그들을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냈던 사울이(28:3) 일이 다급해 지자 도로 찾게 된 것입니다. 신접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물어보는 영매입니다(신 18:11). 이들은 귀신의 힘을 빌려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자들로서 그들을 따르는 것은 곧 귀신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엄히 금하셨습니다(레 19:31 ; 20:6).

사실 귀신은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귀신같이 알 수 있지만 장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래의 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영매를 찾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보다 귀신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는 우상 숭배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찾아다님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레 19:31).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께 구해야지(사 8:19) 귀신을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사울은 신전합 여인을 찾았습니다. 귀신의 힘을 빌어서라도 어떻게 하면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을지 또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접한 여인이 엔돌에 있다는 보고를 받은 사울은 들키지 않도록 변장을 하고 그곳으로 가서 자신이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고 청했습니다. 여인은 과거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킨 일을 언급하며 왜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죽게 하려는 것이냐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이 일로 그 여인을 해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있으니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는 사울의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거나 아무 의미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우상들의 이름과 함께 부르거나 농담에 사용하는 것, 지나가는 말로 아무 의미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입니다. 농담으로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누구를 불러 올리랴는 여인의 물음에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했고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 여인은 비로소 변장하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사울임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신접한 여인이 정말 사무엘의 영을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사무엘의 영을 보았다는 견해도 있고 신접한 여인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하다거나 귀신이나 사탄이 사무엘처럼 가장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 선지자가 실제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접한 여인의 주술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하에 악한 영을 사용하셨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신접한 여인이 본 것은 진짜 사무엘의 영이 아니라 그를 가장한 마귀의 영이며 이는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살길 만을 도모하며 자기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는 사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한 방법으로 악한 영을 사용해서 그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함께 블레셋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31:6). 역대기 기자는 사울이 죽은 이유에 대해 그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대상 10:13, 14). 사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말로가 어떤 지를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과 사울은 신앙 밖에 있다가 모두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다윗은 신앙 안에서 겪는 어려움을 피하고자 신앙 밖으로 나갔고 사울은 세상의 욕심 때문에 신앙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에게 신앙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도 많이 있었지만 사울은 그 기회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큰 위기에 봉착하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니 귀신의 힘을 빌어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따라 행동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움직였던 사울,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는 사람에게 인기 얻는 것을 더 좋아했던 사울은 그의 세 아들과 그 온 집안이 함께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 역시 신앙 밖으로 나갔다가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휘말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신앙 안에서 겪는 고난이 심히 크고 두려워서 잠시 신앙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다윗처럼 신앙으로 겪는 고통이 힘들어 잠시 신앙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고 사울처럼 세상의 욕심과 쾌락 때문에 신앙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 안에 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잠시 신앙 밖으로 나갔다 할지라도 다윗처럼 다시 신앙 안으로 다시 들어와야 합니다. 사울처럼 신앙 밖에서 머물다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본 문 삼상 30:1-6 2022년 6월 5일
제 목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시 청 YouTube : https://youtu.be/tkALFyN-cfs
KakaoTv : https://tv.kakao.com/v/429357191
본 문 삼하 1:17-27 2022년 6월 12일
제 목 슬픈 노래, 활 노래
시 청 YouTube : https://youtu.be/pcp9MUo0r7E
KakaoTv : https://tv.kakao.com/v/429561767
본 문 삼하 2:1-7 2022년 6월 19일
제 목 어디로 가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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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 죽자 다윗은 왕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왕이었습니다. 다윗의 동족인 유다지파만 그를 왕으로 인정했을 뿐 다른 지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울의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섬겼습니다. 이스보셋의 본 이름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의 에스바알입니다(대상 8:33). 다윗이 이스라엘 온 지파가 인정하는 왕이 되기까지는 7년 6개월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다윗은 이스보셋과 전쟁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이는 후에 이스라엘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될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윗은 시글락에서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쫓던 사울이 죽었으니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스스로 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다윗은 어떤 결정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뜻을 묻곤 했습니다. 하지만 종종 스스로 결정해서 행한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위험에 처하곤 했습니다. 이제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어디로 가야 할지 여쭙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림과 둠밈이었을 것입니다. 우림(אוּרִים)은 '빛'을 뜻하고 둠밈(תֻּמִּים)은 '완전'을 의미하는데,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א)과 끝 글자인 타우(ת)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림과 둠밈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처럼(계 1:8 ; 계 22:13) 하나님께서 처음과 나중이시요 모든 역사의 원인과 결과가 되신다는 신앙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온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결정은 불완전합니다. 옳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정 언제나 완전하며 어둠 속의 빛처럼 우리를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잠언 기자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했습니다(잠 3:5, 6). 우리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는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헤브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로(민 13:22) 다윗의 동족 유다지파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성읍은 도피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수 21:3).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진 후 이곳에 정착해 살았고, 이곳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 역시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1 : 50:13). 지리적으로도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에 있어 천연의 요새였고, 주위에는 샘이 많고 비옥하여 과수재배에 적합했습니다. 헤브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유다의 수도로 삼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헤브론으로 가라고 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왜 헤브론으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왜 헤브론인지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결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나아갔던 것처럼(히 11:8) 다윗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간 다윗은 그곳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2:4, 7). 비록 반쪽짜리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왕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왕으로서 다윗이 처음 한 일은 공의를 베푼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사울을 장사 지낸 사람들이 길르앗의 야베스 사람들이라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을 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벧산까지 가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지고 야베스로 돌아와 장례를 치러주었습니다(31:13 ; 대상 10:1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이렇게 한 것은 과거 사울에게 받았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에게 선정을 베풀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베풀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벌을 내리는 공의로운 통치였습니다.

공의는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 가장 필요한 덕목인데(잠 29:4 ; 미 3:1) 다윗은 모든 백성들에게 이 정의와 공의를 베푼 왕이었습니다(삼하 8:15). 또 공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삶이기도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가운데 하나가 공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미 6:8).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을 향해 입을 열 때마 공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암 5:7). 이것은 이스라엘이 전혀 공의롭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하여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할 정도로 이스라엘이 타락해 있었습니다(렘 5:1).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했는데(창 18:12) 이스라엘의 죄악은 그보다 더 심각했던 것입니다(겔 16:47).

잠언 기자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 즉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잠 21:3). 이스라엘 백성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도 하고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나 히스기야, 요시야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왕이었을 때는 하나님을 섬겼지만(대하 31:21 : 34:32, 33) 르호보암이나 므낫세처럼 악한 왕이 다스릴 때는 우상을 섬기며 온갖 악을 행했습니다(왕상 14:22 ; 왕하 21:9).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책망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모이는 것을 게을리했거나 제물을 드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과 절기들에 열심히 모였고 많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또 기도하지 않아서 책망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뇌물과 선물 받기를 좋아하고 돈 없고 힘없는 고아나 과부의 송사는 받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멀리한 채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했습니다(사 1:23). 지도자들이 그러니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을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사 1:10). 소돔과 고모라는 악과 타락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영원한 불로 심판을 받아 훗날 경건치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로 삼으신 도시이기도 합니다(벧후 2:6 ; 유 7).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를 ‘음란한 행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벧후 2:7, 8 ; 유 7). 음란한 행실이란 동성애를 비롯해 성적으로 문란한 행위를 말합니다(레 18:22, 23).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만은 아닙니다. 에스겔서는 소돔의 죄악을 이렇게 언급합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겔 16:49-50). 먹을 것이 많고 아무 걱정 없이 태평세월을 누리게 되자 마음이 교만하여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고 거만하여 더러운 일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죄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했습니다.

겔 16:47 말씀입니다.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하지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은 동성애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동성애보다 더 가증히 여시 기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신 7:26 : 13:12-16 ; 롬 1:23, 25). 흠이 있는 제물 혹은 그것을 드리는 행위(신 17:1), 불공정한 거래(신 25:16 ; 미 6:10) 등도 모두 하나님께는 가증스러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이런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정의를 행하지 않았으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았고 고아나 과부, 나그네 등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 10:18).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불법을 행함으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부패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때론 과격하게 반응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불법적으로 여기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했습니다(롬 12:1).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고 예배가 곧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삼상 25:30). 그럼에도 유다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 사람들이 다윗 대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따른 데에는 아브넬의 영향이 컸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사울 대신 택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삼하 3:9,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아브넬 역시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사울과 가까운 친족이었으므로(삼상 14:50 ; 대상 8:33) 그에 대한 의리 때문에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스보셋을 이용하여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 것입니다(3:6). 지난 시간에 살펴본 아말렉 사람처럼 아브넬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꾀하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관계는 리스바 사건으로 인해 깨지고 맙니다. 사울에게 리스바라는 첩이 있었는데, 아브넬이 그 첩을 범하자 이스보셋이 그를 책망합니다. 그런데 뭐 뀐 놈이 성을 낸다고 아브넬은 오히려 화를 내며 다윗을 따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차피 이스라엘은 다윗이 통치하게 될 것이니 이 기회에 다윗에게 붙어서 출세를 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넬은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아브넬이 기회를 잡기도 전에 죽임을 당함으로써 기회주의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기회주의자였다면 그를 죽인 요압은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감정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죽인 이유는 아브넬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입니다(3:27). 더불어서 다윗의 군대장관이었던 요압은 아브넬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결국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과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압의 감정적인 행동으로 인해 다윗은 또 한 번 위기를 겪을 뻔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다윗이 요압을 시켜 아브넬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3:37).

우리는 아브넬처럼 공의를 저버린 채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기회주의자가 되지도 말고 요압처럼 공적인 일은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감정만을 앞세우는 감정주의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 문 삼하 5:1-10 2022년 6월 26일
제 목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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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에게는 아히노암과의 사이에서 난 네 명의 아들과 두 딸(삼상 14:48, 49 ; 대상 9:39) 그리고 리스바라는 첩에서 난 두 아들(삼하 21:8)이 있었습니다. 사울과 아히노암의 세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이스보셋은 부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울의 가문은 이렇게 몰락을 했고 다윗은 비로소 온 이스라엘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의 여정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1. 순종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가문이 몰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결과였으며,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그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삼상 13:13 ; 15:23). 사울은 왕이 되기 전과 왕이 된 직후만 해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했고(삼상 9:21 ; 10:27 ; 11:5) 관용을 베풀 줄 알았으며(삼상 11:13)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삼상 11:9).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사울의 불순종은 왕위에 오른 지 이 년쯤 되었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이끄는 군대가 블레셋의 수비대를 치자 그 소식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습니다. 그 규모가 병거가 삼만 대, 마병이 육천 명이었고, 일반 보병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습니다. 이에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면서 사무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일주일을 기다리라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 사이 백성들은 전의를 상실해 도망쳐 숨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남아있는 백성들 조차도 두려워 떨었습니다. 조급해진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 전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사울이 직접 드렸는지 아니면 당시 제사장인 아히야(삼상 14:3)의 집례로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후자일 경우 제사를 드렸다는 자체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전자일 경우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에 관한 모든 일을 제사장이 주관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울의 행위는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는 월권행위였으며,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남 유다의 열 번째 왕이었던 웃시야는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환자가 된 적도 있습니다(대하 26:16-21). 어는 쪽이든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이는 망령된 행동 곧 해서는 안 될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삼상 13:13). 그 결과 사울 왕조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삼상 13:14).

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받습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공격한 아말렉에 대한 징계였습니다(삼상 15:2, 3).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왔으며, 가축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남겨두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사울은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삼상 15:15, 21)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삼상 15:24). 백성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삼상 15:30).

이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고 하면서 사울을 책망했습니다(삼상 15:22, 23).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더 기쁘게 여기시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 5:1)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갈 때에, 발걸음을 조심하여라. 어리석은 사람은 악한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제물이나 바치면 되는 줄 알지만, 그보다는 말씀을 들으러 갈 일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제사도 제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솨마(명령형 쉐마)인데, 이 단어는 '경청하다'와 '순종하다'는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번역을 하거나 두 단어를 합쳐서 '청종(하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르는 대로 잘 듣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울이 처음에 가졌던 스스로를 작게 여기는 마음,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고전 10:31).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다윗은 죄를 범했을 때 자신을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기를 간구했습니다(시 51:11). 우리의 삶이 사울과 같은 불순종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며 늘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2. 공의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를 틈타 군지휘관이었던 두 사람 곧 바아나와 레갑이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지고 헤브론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가서 머리를 바치며 '오늘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후손들에게 갚으셨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이스보셋을 죽여 놓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자신들의 손을 빌려 갚은 것인 양 포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윗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전에 그런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다윗이 시글락에 있을 때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준 아말렉 사람입니다. 그는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윗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을 했고, 그를 통해 보상을 받으려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급은 고사하고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삼하 1:15). 다윗은 이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스보셋을 죽인 두 사람을 처형했습니다(4:10, 12). 그들의 죄명은 '악인의 피흘린 죄'였습니다(4:11). 바아나와 레갑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 무고한 자의 피를 흘린 악한 자들이었으므로 율법에 따라 그들 역시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신 19:13). 이처럼 다윗은 모든 일을 공의에 입각하여 행했습니다(삼하 8:15).

사실 사울의 죽음이나 그의 아들 이스보셋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음으로 다윗은 반대 세력이 없이 쉽게 이스라엘의 왕권을 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죽음도, 이스보셋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고, 오직 공의와 정의를 행하기 위해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암 5:24).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송을 받지 않고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암 5:23). 삶이 예배가 되지 않으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며, 찬송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처럼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으며 언제나 공의와 정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인내

다윗은 사울에 이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왕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고 여러 차례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만 인정하는 반쪽짜리 왕이었습니다. 더 이상 사울에게 쫓겨 다니지 않아도 되었지만 안심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임으로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는데 큰 차질이 생길 뻔했습니다. 이 모든 위기를 넘기고 비로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의 통치 기간은 유다 족속의 왕으로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온 이스라엘 지파의 왕으로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 년을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이 몇 살 때 기름부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삼상 16:13) 그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이십 년 정도 지났다고 봅니다. 이 시간이 어떻게 보면 길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다윗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연단의 시간들이 있었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끈 모세도 연단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였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힘든 순간들을 잘 참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낸다'고 하면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습니다(약 1:4).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온전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 견딘 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는 약속(히 6:14 ; 창 22:17)을 받았다고 했습니다(히 6:15). 인내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욥입니다. 그는 고난을 받을 때 인내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약 5:11). 그러므로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믿음과 안내를 가지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롬 5: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그의 가문이 몰락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삼상 13:13 ; 15:23).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는데,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했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들 때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 2)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모든 환란을 믿음으로 인내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려고 힘썼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지키려고 힘쓴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5:5). 그런 다윗에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고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갔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모든 환란을 믿음과 인내로 이겨내야 합니다. 어렵다고 힘들다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언제나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자들을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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