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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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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34절 ~ 39절 [개역개정]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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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지고 있는 온갖 감정을 희로애락(喜怒哀樂)이라고 합니다. 곧 기쁨과 노여움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감정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의 불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그것을 일으키는 어떤 실제적인 대상이 있지만 불안의 대상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한 근심이나 걱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바로 불안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과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활을 못하게 하거나 제대로 할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이 두려움과 불안이 미치는 영향은 큽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두려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사람들과의 불화에 대한 두려움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5, 36). 이는 구약의 미 7:6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복음으로 인해 가족 간의 불화가 생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집안 식구가 자기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양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하나님보다 자기 가족을 더 사랑한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예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했습니다(딤전 5:8). 만일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사람의 기본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들로 인하여 결국 예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가족이나 또는 세상 사람들과의 불화를 각오해야 하며, 이것을 견디어 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두렵다고 신앙을 멀리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2.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느 두려움보다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마귀에게 종노릇 하며 살았습니다(히 2:14, 15).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서(엡 2:2)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권세는 사람들을 꾀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하게 함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사탄은 이 죽음의 권세를 앞세워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협박을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호 13:14 ; 고전 15:55).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구태여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히 11:35). 하지만 마귀는 아직도 자신이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속이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시대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문대 위에 묶여 몽둥이로 맞아 죽거나 돌로 맞아 죽기도 하고, 톱질을 당해 몸이 반으로 잘려 죽거나 칼에 죽기도 했습니다. 또 사자나 불 혹은 기름 가마니에 던져져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광야나 산 혹은 굴속으로 피신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숨어 살면서 굶주림과 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히 11:36-38). 그들은 모두 믿음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었고 또 믿음으로 이런 고통을 견디어 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며,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고 있는 일들입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2017년도 기준으로 전 세계 8억 명의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2억 1,500만 명은 '높은 수준'의 박해를 경험했으며, 순교한 사람도 3,000명이 넘습니다(참조. 크리스찬투데이, "지난해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 3,078명" 이지희 기자, 입력 : 2018.01.10 17:27,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08210) 반면에 핍박을 피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고,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신앙을 떠난 자들도 있습니다(딤후 4:10).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32, 33)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처럼 종교의 자유가 없는 시대나 그런 나라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핍박과 고난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마 16:26)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히 9:27). 그러므로 사람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또 다른 세계 즉 영원한 세계의 시작일 뿐입니다. 자기의 안전을 위해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육의 생명을 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생명은 잃고 말 것입니다. 즉 육체적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여(히 2:15)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을 지키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온갖 핍박을 받으며 심지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과의 불화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사람들에게 대접받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셨고, 가족들에게조차도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심지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예수님은 대접은커녕 온갖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10:25). 스승도 이런데 하물며 그의 제자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대접받지 못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고 사람들에게 대접받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둘째,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든 마귀든 몸은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비록 사탄 마귀가 일시적으로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욥을 시험한 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욥 1:12 ; 2:6).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 우리나라 돈으로 몇 천 원 정도에 팔리는 보잘것없는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참새보다 귀한 사람들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그들을 생각하고 계시며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십니다(10:30).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나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려고 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눅 12:20).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나 명예도 아니고 육체의 생명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람들과의 불화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지혜롭게 어려움이나 핍박을 피하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순결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거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인한 어려움을 당할 때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를 위하여 온갖 멸시와 조롱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언제나 우리를 돕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고난도 잘 참고 견디어 결국에는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