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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022. 8. 18.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11장 25절 ~ 30절 [개역개정]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설교문 보기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9-11).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례 요한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천국의 백성만은 못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즉 혈통에서 난 자들이지만 천국 백성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요 1:13).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천국 백성으로서 가지는 권세는 세상의 그 어떤 특권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요 1:12). 마치 그림자와 실체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히 8: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침노를 당하고 있으며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침노를 당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비아제타이(βιαζεται)'는 수동태와 중간태 모두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중간태란 쉽게 말하면 형태는 수동태인데, 능동태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단어를 수동태로 해석하면 천국이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빼앗기거나 점령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가 땅을 얻지만 천국은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게 됩니다(마 5:5). 반면에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해석하면 '힘차게 뻗어 나가다' 혹은 '강제로 밀고 나가다'라는 의미로, 본문은 이렇게 중간태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천국이 침노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이 침노를 하는 것이고 이는 천국이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역동적인 표현입니다.

눅 16장에 보면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 말씀의 배경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βιαζεται)"(눅 16:16) 이 말씀과 비교해서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면, 천국이 침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힘차게 전파됨을 의미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은 천국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비유를 들어 그들이 누구와 같은지를 설명하셨습니다(눅 7:31).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6, 17) 당시에는 장터가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장터에서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결혼식 놀이의 경우 보통 두 편으로 나누어 한쪽이 피리를 불면 다른 쪽은 그에 맞춰 춤을 추고, 장례식 놀이도 한 편이 슬피 울면서 곡을 하면 다른 편은 거기에 맞춰 애통하며 가슴을 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놀이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놀이에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는 아이들이 없었고, 장례식 놀이에서는 한 편이 슬피 울면서 곡을 해도 상대 편이 그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철저한 무시와 무관심을 말하는 것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는 당시 유대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철저히 무시했으며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11:5). 그럼에도 복음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21). 반면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에게는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당시 유대인들은 먹고 사는 문제 외에도 율법으로 인해 힘들어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은 십계명(출 20:1-17)을 비롯한 일부 규칙들이었습니다(출 20:22-23:33 등). 그런데 유대의 지도자들이 이 율법을 모두 613개의 조항으로 세분화했고 여기에 장로들의 전통(마 15:2)을 추가해서 생활 전반에 적용토록 강요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원의 길인 동시에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상당한 불이익이 오기 때문에 백성들은 613개 조항으로 된 율법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마치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마 23:4 ; 행 15:10). 이로 인해 백성들은 영육간에 몹시 지쳐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입니다. 비단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해서 먹고사는 문제를 위해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심고 거두어야 하며, 추위와 더위 그리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쉼이 아니라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11:29). '마음'이란 영혼(프쉬케, ψυχή)을 의미합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면 죄로부터 해방되고(롬 6:18, 22). 삶에 대한 걱정과 근심, 불안과 염려 등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쉼을 얻을 때 육체적인 수고도 능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쉼을 얻는다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야한다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멍에를 멘다'는 말과 '쉼을 얻는다'는 말이 상충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멍에란 수레나 쟁기 또는 무거운 짐을 끌게 하기 위해 소나 나귀의 목에 얹는 나무를 말하는데, 이것을 메면 오히려 더 힘들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멍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면 '멍에를 멘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를 가리킬 때 '함께 멍에를 멘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멍에는 항상 짝을 이루어 메도록 했는데, 이를 '겨리' 라고 합니다(신 22:10 ; 눅 14:19). 따라서 예수님이 '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것은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멍에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마 2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은 자신이 짊어지시고 대신 가벼운 짐을 우리에게 지도록 하십니다. 이 짐은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의 깃털처럼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만큼 가볍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배운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 곧 온유와 겸손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와 겸손은 단순히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나아가 온유와 겸손 즉 사랑이라는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영혼의 쉼,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하면서도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멍에를 메지 않으려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를 메는 것이 쉽다고 하셨고(11:29), 사도 요한은 그것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요일 5:3). 그럼에도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게 보이는 것은 그것을 메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영혼의 쉼을 얻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하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어디에서도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 누구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또 세상이 알 수도 없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요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