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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2022. 12. 22.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18장 5절 ~ 14절[개역개정]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설교문 보기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마 18:4)라고 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마 18:5)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순히 나이가 어린아이를 가리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혹은 신앙적으로 연약한 사람을 의미합니다(마 18:6 ; 롬 14:1 ; 고전 8:11). 그런 사람들을 소홀히 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겸손이고, 겸손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연약한 자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하거나 고의든 실수든 그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자들은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들을 없애야 합니다. 예를 들어, 손이나 발이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내던져 버리고, 눈이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내던져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 손이나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차라리 신제 장애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이미 하신 바 있습니다(마 5:27-30). 그런데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그때마다 제거해 버리면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단호하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제거해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히 12:4). 그럴 용기가 없다면 죄를 멀리하고 바라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죄의 자리에 앉지도 말고 죄의 길에는 서지도 말며 죄의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업신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양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가축으로 식용으로 뿐만 아니라(삼상 14:32), 옷을 만드는 재료로(겔 34:3) 또 희생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레 1:10 ; 4:32 ; 5:15 ; 22:21). 양은 순한 동물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을 정도로 그 성격이 매우 온순한 반면 어리석고 약하며 길을 잘 잃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의 목초지대는 대부분 높고 그 폭도 좁아 눈앞의 풀만 뜯어먹으며 이동하는 양들이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일을 예로 들어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사자나 이리 같은 맹수가 있어 보통 서너 명이 양 떼를 지켰습니다(눅 2:8). 목자들은 저녁이 되면 양의 수가 맞는지 확인을 하는데, 한 마리라도 없을 경우 그 양을 찾기 위해 온 지역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잃은 양을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대체로 좁은 골짜기의 벼랑에 걸려있어서 그 양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절벽을 타고 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고 맹수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목자는 양을 찾기 위해 이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목자는 그동안의 고생을 모두 잊고 기뻐합니다. 이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해산할 날이 가까워진 여자가 겪어야 할 진통 때문에 근심하다가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났다는 기쁨에 그 고통을 잊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요 16:21). 아무튼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 그 한 마리로 인하여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면서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를 길 잃은 양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사 53:6). '그릇 행하다'는 말은 '길을 잃다’는 뜻으로 단순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미혹을 받아 곁길로 나간 것을 말합니다(렘 50:6).

양들이 길을 잃는 것은 풀을 뜯어먹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거나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 풀은 우리로 하여금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해서 결국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세상의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염려일 수 있고 재물의 유혹이나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막 4:19).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에 정신이 팔려 목자 되신 주님(시 23:1)의 음성을 외면한 채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파멸의 길로 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의 때와 같습니다. 노아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지만(벧후 2:5)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세상 일에 정신이 팔려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늦기 전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자신의 양 떼가 다른 무리의 양 떼와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양의 모습이나 색깔, 특징에 따라 각각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요 10:3). 그 가운데 어떤 양이 길을 잃어버리면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습니다. 양은 자신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목자는 그 양을 발견하고 위험에서 건져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고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계 3: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 벧후 3:9).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끝까지 세상에 정신이 팔려 진리를 거부하고 자신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외면하는 자들에게는 심판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자에게 있어서 양은 자식과 같은 존재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소중하지 않은 자식이 없는 것처럼 목자에게 있어서 소중하지 않은 양은 없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양과 같은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라고 어른보다 덜 소중한 존재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보다 덜 소중한 것도 아닙니다. 많이 배웠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소중한 존재도 아니고, 건강하다고 몸이 불편한 사람보다 더 소중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이방인보다 더 소중한 것도 아니고, 바리새인이라고 해서 세리보다 더 나은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을 그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으며(계 1:5) 그 대가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대속제물로 주셨습니다(딤전 2:6). 누구든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예수님의 피가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고(벧전 1:19 ; 요일 1:7)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2).

그런데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특권을 가진 사람들처럼 세리나 창기,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며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지도 않았고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고전 6:20)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결코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가족(엡 2:19)이며 한 몸(롬 12:5)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