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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음TV/수요예배설교

마태복음 강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2022. 7. 21.
성경본문 보기

마태복음 10장 1절 ~ 4절 [개역개정]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설교문 보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이번 시간에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들은 요한[요나]의 아들 베드로와 안드레처럼 친 형제지간입니다(마 4:21). 어머니 살로메는(마 27:56 ; 막 15:40) 예수님의 이모로 추정이 되는데(요 19:25)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입니다.

1. 보아너게 : 우레의 아들들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 보아너게는 '우레 곧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입니다(막 3:17). 야고보와 요한이 이런 별명을 갖게 된 이유는 그들의 성격과 관계가 있습니다.

1) 옹졸하고 과격한 성격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곳을 지나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부정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후(B.C. 772년) 그곳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남아있던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입니다(왕하 17:24-40). 요즘 같은 사회에서는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똑같이 취급하거나 이방인보다 더 부정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는 것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출입도 금했습니다. 심지어 유월절의 무교병도 먹지 못하도록 규정했는데,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워낙 머리가 나빠서 그 의미도 모르고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바빌론 탈무드).

요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보면 이런 상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성 우물가에서 어떤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자 그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 4:9) 요한은 그 이유를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지역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거나 반대로 갈릴리지역에서 예루살렘에 갈 때는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요단 동쪽으로 우회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굳이 그들을 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가 가까이 오자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결심하시고는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통과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눅 9:54). 구약성경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를 잡으러 왔던 자들이 하늘에서 내린 불로 인해 죽임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왕하 1:10, 12).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가 행한 것 같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들을 거부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들 속에 특권의식과 권위의식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어느 마을에 머물고 있을 때 어떤 낯선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람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만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았으며, 또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사람이 더 이상 귀신을 쫓아내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 금하지 말라"고 말입니다(9:40 ; 눅 9:50).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열 두 명을 따로 세우셨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 10:1 ; 눅 9:1).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을 행했습니다(눅 9:6). 하지만 그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명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서 사도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으로 사회적 신분이나 학벌, 가문 등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택하여 사도로 삼으신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선택이었고 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특권의식이나 권위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가져야 할 것은 자신들을 택하여 제자로 삼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2) 이기적인 성격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 계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마 27:56 ; 막 15:40)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스릴 나라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자기 아들들에게 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에게 그런 부탁을 하게 했을 것입니다(막 10:35-37). 다른 제자들이 이 얘기를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들 역시 높은 자리에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막 9:34).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 27)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려 하고 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백성 위에서 권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큰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가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마 23:11). 예수님께서는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요 13: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 도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12)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했지만 그럼에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번뇌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오직 '누가 크냐'(막 9:34)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스릴 왕국을 기대하며 그때 자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할 것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자기의 동료들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것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왜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내가 과연 그러하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 13:13-15)

당시에 발을 씻겨주는 일은 매우 천한 일로 간주되어 종이 담당했습니다. 때문에 이 일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생님 혹은 주님[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이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누가 큰지 따지고 있던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친히 이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섬김이란 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곧 겸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겸손할 때 비로소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신을 낮추며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높임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2. 야고보 : 최초의 순교자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I세가 유대의 왕이 되자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야고보가 죽임을 당했고(행 12:2) 열 두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를 죽인 헤롯 아그립바는 후에 벌레에 먹혀 죽임을 당했습니다(행 12:23).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하면 야고보는 고소에 의해 법정에 세워졌는데, 그를 고소한 사람이 야고보의 증언에 감동하여 회심을 하고, 야고보에게 사죄를 청하고서는 동시에 참수의 형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3. 요한 : 사랑의 사도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합니다(요 13:23 ; 19:26 ; 21:7, 20). 이 제자가 바로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를 사랑하셨으나(요 13:1), 요한에게 각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요한은 안드레와 더불어 예수님의 첫 제자로서 공생애 초기부터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의 자리까지 항상 주님과 동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자기 어머니 마리아의 신변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요 19:26, 27).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던 요한은 항상 사랑을 강조했습니다(요일 4:7 ; 요이 1:5). 거동이 불편하여 간신히 집회에 참석해서도 늘 사랑만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사도라고 불렸습니다. 또 요한은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자연사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생전에 복음서를 비롯해서 세 개의 서신(요 일, 이, 삼)과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이 옹졸하고 과격하며,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야고보와 요한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마 11:9)과의 생활을 통해 점점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행 12:2),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사람으로 항상 사랑을 강조하고 실천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번에, 완전히 바뀔 수는 없지만 조금씩이라도 변화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롬 12:2). 우리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삶은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